식구들 모두 새벽 단잠인 시각 4시.
맞춰 놓은 알람이 흔들어 깨우지도 않았는데 유독이 아침 잠 많은 이 잠보가 대견하게도 스스로 잠 속에서 빠져 나왔다.
동시에 난 아직도 어두워져 있는 공간에서지만 날렵하게 전날 밤 머릿속에 계획 했던 순서에 따라 행동 개시에 들어 갔다.
소리는 되도록 줄이고, 행동은 민첩하게, 준비는 철저 하고, 뒷마무리는 깔끔하게 완료.
방방이 아직도 잠 속에서 세상 모르고 있는 식구들에게 허공에 남기는 입 맞춤을 끝으로 내게 허락된 나만의 외출이 비로소 시작 되었다.
어둠과 밝음이 교묘히 공존 하면서 겸허와 희망을 메시지로 전하는 이 여명의 순간이 참으로 내겐 늘 설레임으로 상기 되지만 게으름의 소치로 이 거룩한 순간을 만끽 못하며 사는 나는 이런 날 이 자체만으로도 행복이며 벅차 오름이다.
헌데 거기다 오늘은 벗들과의 여행을 위해 새벽 길을 나섰으니 야릇한 해방감과 기대감으로 그 설레임은 배가 된다.
벗들과 만나기로 한 장소까지 난 차를 몰고 한 달음에 달렸다.
'와! 평소 그리도 복잡한 서울 거리를 언제 이렇게 황홀한 속력을 내며 달려 볼 수 있었던가
에라 원없이 달려 보자. 그렇게도 주눅들게 하던 거리의 제왕들이 아직은 등장 안한 틈에 나도 한 번 기 펴고 폼 나게 달려 봐야지'
정말 평소에는 한 시간 남짓 걸리던 거리를 딱 반으로 시간 단축시키며 달려 만남의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그런데 세상에 난 내가 젤 부지런한 줄 알았는데 왠 걸, 11명 모이는 중에 10번째 도착이었다. 미안해 하며 꾸벅 꾸벅 몇 번 목례하고 나서 숨 고르고 시계 보니 시계 바늘 아직 약속한 6시 못 미쳤건만 다들 얼마나 좋았음 잠도 안 자고 나왔을까.
이번 함께 여행한 벗들에 대해 잠깐 언급 하자면 이렇다.
모임의 이름은 修善會(하지만 우리는 수선스러울 수선이라고 생각 한다).
여러 해 전, 같은 사찰에 다니며 공부한 것이 인연이 된 법우들.
그리고 배운 것 실천 하는 흉내라도 내 보자 맘 먹고 뜻을 모아 양로원 봉사를 시작 했다.
하지만 부끄럽게도 말이 봉사지 다들 일을 가지고 곱절로 바쁘게 사는 사람들이기에 맘 만큼 시간을 자주 내지는 못한다.
다만 한 번 시작 한 일 죽기 전엔 절대로 도중 하차 없다 그 약속 하나로 뭉쳐진 도반들이다. 그런 우리 들이 첨으로 우리들만을 위한 여행을 계획했고, 여행지는 강원도 양양의 낙산사와 휴휴암으로 정했다. 그리고 그 여행이 시작 된 것이다.
우린 렌트 한 봉고차에 11명 오붓이 옹기 종기 올라 탔다.
그리고 4시간 정도 달려 강원도에 들어 서니 비가 제법 내리고 있었다.
서울에서 출발 할 땐 안 왔던 비가 왜 하필 일까...투정이 나올 법 했지만 투정 하면 속상한 여행이 될까 싶어 비가 오니 더 좋다 이렇게 맘 바꾸기로 했는데, 그런 우려가 어이 없다 하는 비웃음이 금새 눈 앞에 펼쳐 졌다.
해안선을 따라 우리들 시선에 들어 오는 끝 간데 없는 망망 대해...이것만으로 다였다 해도 감동의 도가니였음이 틀림 없다. 하지만 모처럼 맘 내고 시간 낸 우리에게 바다는 더 큰 감동을 선사 하고 있었다.
초겨울 에이는 바람과 비 앞에서 굉음을 내며 포효하는 그 웅장한 바다를 눈으로 직접 안 봤으면 상상이나 되었을까.
오색 찬연한 단풍의 미쳐 나는 화려함에 세상의 시선은 산으로 향하고, 여름날 누렸던 영광의 후유증으로 홀로 몸살을 앓았을 저 바다는 태풍의 소용돌이로 한바탕 뒤집어졌을 텐데 지금의 몸부림은 自淨하는 초겨울 몸짓이리라.
그토록 광활한 바다를 한 시선에 담으며 한자리 고요 하게 위치 한 휴휴암에 드디어 다달았다.
마침 사시 예불 시간이라 스님의 기도 염불 소리가 흘러 나오고 저절로 발은 먼저 그 염불 따라 대웅전으로 향하니 살그머니 입방하여 기도 동참 하는데 스님의 그 경건하신 예불 집전 모습은 환희심과 존경심이 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무정들도 얼마나 감흡 했으면 바위도 화현 하여 부처 모습이 되고 거북 모양이 되고 연잎 법당이 되었을까.
쉬고 또 쉬라. 이름하여 休休岩...기막힌 터구나!
헌데 좀 있자니 왁자지껄 순식간에 차량과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기 시작했다.
'이런 이런... 경망스런 인간들의 상흔이 또 성지 한 곳을 오염 시키고 있구나' 아차 싶었고 따라서 맘 한구석에 생채기 하나 남기고 나부터 반성하며 돌아 설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뒤로 하고 우린 다음 목적지인 낙산사로 향했다.
낙산사 하면 너무 유명한 곳이라 그 명성이 귀에 익은 것을 가지고 나는 그 동안 잘 안다고 착각 했던 모양이다.
도량을 세세히 다 돌고 보니 내 아직 낙산사의 진면모를 제대로 본 적이 없었구나 새삼스러웠다.
경내 전각으로 가는 길목마다 감탄과 감격과 감동이 절로 일어 오감은 떨리고 몸에는 소름을 돋우니 전률이란게 바로 이것이구나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산쪽으로 위치한 전각 가는 길은 그야말로 나무가 숲을 이루고 그 나무를 둘러 싸고 비를 잔뜩 머금은 잎새들이 흐드러져 있는데, 나무에 달렸으면 달린 대로 땅에 떨어 졌으면 떨어 진대로 사람을 기막히게 매혹 했다.
헌데 어떻게 매혹 하는 고 하니 빛깔과 모습은 과연 지천명이다 싶게 곰삭고 원숙한 자태가 가히 젊음의 그 화려한 교태에 언감생심 견줄 바 못 되며. 물기 머금어 뿜어 대는 그 자연의 향내는 어떤 향수의 마법으로도 감히 범접 못할 생명이었다.
그뿐이랴 바다로 향해 있는 대자 대비 해수 관세음 보살상은 어떠하며, 바다를 터로 잡고 앉은 홍련암 전각은 또 어떠하리...
이토록 산과 바다의 경계를 두루 넘나 들며 세워진 이 웅장한 관음 도량은 그 자체로 대자 대비 관세음보살님의 정토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늘에 맞닿아 산이 있고, 산에 맞닿아 바다가 있고, 바다에 맞닿아 다시 하늘이 있고...그 속에 내가 존재 하고, 우리가 존재 하고...
자연과 내가 하나 됨을 깨닫는 이 황홀 무아 지경을 잠시만 더 누리게 하소서!
대자연 속에서 절로 동화 되고, 절로 숙연해 지고, 절로 겸허 해 지며, 절로 벗게 되는 이 순간 만큼은 어떤 욕심도, 이기심도 위선도 있을 수 없었다.
우린 함께 소리 쳤다.
'다 던지고 갑니다!' 라고
나름대로 살면서 버겁고 가증스런 짐들 우린 그렇게 미련 없이 벗어 던졌다.
그리곤 바다가 삼키고 파도가 산산 조각 내고 결국은 물거품이 되어 사라지는 걸 우리의 눈은 목격 했다.
그리고 나서 우린 그 비워 버린 가슴 가슴마다에 새로운 행복 가득 담았다.
이젠 가슴 가득 담긴 이 따뜻한 행복을 사랑 하는 가족들에게 식히지 말고 전해 줘야 했다. 그러기에 아쉬움은 조금만 남겨 두고 서둘러 귀가 길에 올랐다.
돌아 오는 내내 우린 너무 좋아 웃고 또 웃고...웃다가 너무 웃어 배 아프고 눈물 나고...아마 모르긴 몰라도 평소 웃을 웃음 한달치는 더 웃었지 싶다.
정말 뭐라 뭐라 할 것도 없이 너무도 행복한 여행이었다.
다들 24시간을 배로 늘려 하루에 써도 부족 할 이 성실한 사람들 틈에 내가 끼어 이런 소중한 경험을 했다는 것이 더 없는 고마움이다.
집에 돌아 오니 사랑 하는 가족들은 아낌 없는 반김으로 아내를 엄마를 맞아 주었다.
나 또한 보답으로 얼른 가슴 열어 아직 식지 않은 따스한 행복 온기를 온 몸으로 전해 주었다.
일상을 벗어 난 오늘의 이 특별한 외출이 내겐 적어도 한동안 강력한 에너지로 쓰여질 것을 안다.
그리고 오늘 하루를 조용히 갈무리 해 놓고 보니 끝까지 남는 맘과 말 한 마디,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