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자수려한 곳에 영웅호걸이 많이 나는 법이라고
예로부터 강원도 통천은 사람 살기 딱 좋은 곳이었단다.
통천 출신으로 정계나 재계에서 이름을 떨친 인사들이 꽤나
많이 있었는데 할머니는 그들과 다 연이 닿아 있었다.
(할머니는 고향사람들의 구심점 노릇을 하셨다)
금강산을 끼고 관동팔경중의 하나인 총석정을 위시하여
이름난 명승유적지들이 많았고
그 힘들다던 일제강점기 수탈정치 때에도 별 어려움 없이 날 수 있었다 한다.
교통의 요지이고 천혜의 자원들로 가난한 사람이 별로 없는,
교육열 또한 높아 시골에 사는 사람들도 보통학교는 거의 나오고
왠만하면 서울이나 평양 그밖의 상급학교가 있는 곳으로 대개 유학을보내
전체적으로 지식층들이 많이 살았던 곳이었다 한다.
위로 조금 올라가면 원산의 그 유명한 모래사장과 해당화가 있었다는데
나의 할머니는 명사십리 해당화를 그렇게도 다시 보고 싶어 하셨다.
"내가 죽기전에 금강산과 내고향 통천엘 꼭 가봐야 하는데.."
하시면서 눈시울을 붉히시기 예사였다.
왜 아니 그러셨겠는가?
두고온 금전옥답과 눈에 선하고 쩌렁쩌렁 사람두고 호령하며 사시던 곳인데...
그시절에 이미 전용사진사를 대동하여 백두산과 금강산을 유람하신
가히 여걸이라 일컫는 분이였다.
강원도 통천이란 곳은 땅이 비옥하여 쌀농사도 잘되고
바닷가를 끼고 있어 사시사철 펄펄 뛰는 생선을 입맛에 맞게
먹을 수 있는 축복 받은 땅이었다고 통천 출신 사람들은 한결같이 말하였다.
생선과 관련해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언니가 국민학교 다닐 무렵 방학을 맞이하여 할머니댁에 갔는데
밥상에 자반고등어가 맛있게 구워져 올라 왔단다.
일하는 언니가 고등어 대가리를 하도 맛있게 먹길래
그거 내가 먹겠다고 하면서 고등어 가운데 토막과 대가리를 바꿔 먹고 있는 중에
할머니께서 외출에서 돌아 오시더니 그 광경을 보시곤 천불이나서
마당에 있는 빨래 방망이로 일하는 언니의 등줄기을 벼락같이 후려 쳤다는 것이었다.
언니는 일하는 언니에게 어찌나 미안하고 무참해서 할말을 잃고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고 했다.
공연히 자기 때문에 매맞은 언니에게 송구했던 마음이 지금도 가시질 않는다고 하면서...
할머니는 매우 무섭고 엄격하신 분이었다.(일제 시대에 순사들도 벌벌~~)
나의 어머니는 평생을 당신 어머니 그늘에서
숨 한번 제대로 못 쉬고 사셨다고 한다.
그러나 손주의 사랑만은 지극정성이셔서 우리들이 아플 때
똥까지 찍어 먹어 봤다던 나의 할머니
"애들이 많이 아픈중에 똥이 달면 죽는다드라" 하시면서...
아버지의 임지로 전근다니시는 와중에도 할머니는 바리바리 마른생선과 비린것을
딸네집에 노다지 대주셨단다.
그렇게 입맛이 길들여진 우리 식구는
김치보단 생선을 좋아했고
남의집 식사에 초대 받아가서 생선이 없으면 눈물이 난다는 언니였다.
그야말로 김치는 안먹어도 살지만 생선 없이는 하루도 못사는 우리식구였다.
우리식구는 생선중에서도 가자미 말린것을 무척 좋아했다.
가자미를 대충 꾸덕꾸덕하게 말려 양념을 해 밥위에 올려 찌거나
아니면 후라이팬에 기름 조금 두르고 은근히 튀기면 담백한 그 맛이 기가 막혔다.
비리지도 않고 뼈가 굵어 아이들 발라 먹기에도 안성맞춤이고...
할머니는 해년마다 김장철 즈음에는 어른 손바닥만한 가자미를 몇궤짝을 사오셨다.
얼었다 녹였다 하면서 말려야 맛이 좋은건지
아니면 그때가 가자미가 한창 나올철인지 몰랐지만
가자미를 걷어 드리는 일은 나의 몫이여서
저녁만 되면 해지는 것을 유심히 관찰하면서 놀아야했다.
초겨울이라 손끝이 시리고 매우 귀찮은 일이었지만
여자가 없는 집에서 내가 당연히 해야 할 임무였다.
양철로 된 가게 덧문을 땅바닥에 나란히 맞대어 깔아 놓고
가자미와 무말랭이 호박고쟁이등등을 말렸었다.
어느날은 집 옆에 널어 놓은 가자미가 몽땅 없어졌다.
우리집은 여염집이 아니고 사람들의 발걸음이 잦은 곳이여서
항상 신경을 쓰고 있는터 였는데
애지중지 말리던 가자미가 몽땅 사라진 것이었다.
나는 방안에다 가자미가 없어졌다고 소리치고 발을 동동 굴렀다.
오빠들이 우루루 밖으로 뛰어나오고..
이리저리 찾던 중에 가지미를 푸대에 담아가지고 도망가는 도둑을 발견하였다.
서울방향으로 가는 기찻길로 도망가고 있었다.
장대 같은 오빠들이 줄줄이 그 뒤를 쫒아가고...
"서라 서라"해도 가자미 푸대를 내동댕이치고 도망가는 도둑에게
막내오빠가 집어 던진 돌멩이가 도둑의 뒷통수에 맞아 피가 줄줄 흘렀다.
그리곤 얼마 못가서 잡히고 말았는데...
그때 기억하기로 아마 20대 남짓이나 됐을까?
오빠들 또래 밖에 안되었을것 같다.
우리는 가자미 도둑을 집으로 데려와 치료해주고
밥도 먹이고 아마 차비도줘서 보냈을 것이다.
그땐 왜 그리 먹는거 훔쳐가는 도둑이 많았는지?
자고새면 김장김치에 김장독까지 송두리채 파가고
고추장단지, 된장항아리, 줄줄이 행방불명되기 일수였다.
지금도 가자미만 보면 가자미도둑을 잡겠다고
줄줄이 알사탕모양 뛰어가던 오빠들의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간다.
춥고 배고팠던 60년대초의 이야기이다.
명태식해 , 가자미식해... 추억속의 음식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