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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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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채팅은 안 한다니까


BY 가스등 2003-11-05

 

 

주로 무엇을 하며 여가를 보내세요? 라는 물음에 인터넷을 하기도 하고 게임
도 한다고 대꾸를 했더니 접속을 하면 또 무엇을 하냐며 궁금해 한다. '그래
도 채팅은 안 하는데요..' 라며 퉁을 놓듯 말을 던졌다. '그럼 지금 하는 건
채팅이 아니고 무언가요?' 하는 말에 그만 할 말을 잊었다. 도대체 난 무엇을
채팅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인지, 통신 용어를 쓰며 대화방을 만들어 나누는
것만 채팅으로 생각하고 있었는지, 그의 말처럼 엄밀히 따지자면 훨씬 더 속
닥하고 은밀한 채팅이 아닌가 말이다.

내가 하는 것은 대화요, 남이 하는 것은 채팅이라 생각했는지 지금도 그때 일
을 생각하면 웃음이 나온다. 아마도 남들은 다 봐도 되지만 당신이 봐서는 안
될 일이라 여겨서 곧 죽어도 '채팅은 안 해' 하며 공개적인 대화방보다 일대
일 오붓한 대화를 즐겼는지, 그러다가 그가 오는 기척이 들리면 상대에 대한
예의를 차릴 사이조차 없이 도망치듯 전원을 꺼 버려 아이에게 된 소박을 맞
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도대체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이러나 하는 생각으
로 찜찜해 마음이 무거웠지만 그 버릇은 쉬 고쳐지지 않았다.

컴퓨터 앞에 앉은 아내의 뒤통수를 못마땅하게 쳐다보는 눈길은 돌아 앉아도
따가웠다. 그가 인터넷에 대해 느끼는 감정, 그것을 명료하게 설명해 알아 달
라고 이야기 하기엔 인터넷에 대한 정확한 정의를 내릴 수가 없었다. 인터넷하
면 긍정적인 의미보다는 부정적인 의미가 너무 깊숙하게 자리 잡고 있었기 때
문이다. 가까운 그녀 역시 나를 소개할 때는 '얘는 채팅의 도사여요' 라는 말을
빼놓지 않고 한다. 내가 해 달라고 부탁한 적도 없건만, 그냥 듣기 좋은 말로 '
가끔 통신에서 글도 써요.'라고 해주면 좀 좋을까. 하지만 그녀에게 나오는 소
리는 채팅의 도사라는 뜬금 없는 소리다. 그러자 상대는 '오라 그럼 연애는 기
차게 잘하시겠네..'라는 말로 운을 뗀다.

'연애라니... 기가 막혀서.'

내 아무리 익명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기로, 또 그것을 그들이 본 것도 아니
고 그저 막연하게 마흔이 넘은 여자의 통신은 그렇고 그런 연애밖에 더 있겠냐
는 말일 것이다. 물론 개인적인 시각 차이가 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채팅
을 불륜과 죄악의 온상이라 여긴다. 그러니 챗이란 말만 들어도 알레르기가 날
수밖에..

비켜가는 눈총에 힘없이 '내 취미 생활이야...' 대꾸해봐도 그마저도 먹고 살기
바빠 눈길 돌릴 사이조차 없는 사람들에게는 아까운 인생 낭비요, 쓰잘데기 없
는 허튼 짓에 불과하니 굳이 대꾸를 해 이야기를 이어 가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너와 내 생각이 다르다며 그들의 주장을 반박해 확실히 박아 놓을 수 있는 명분
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의식주의 해결로서만은 채울 수 없는 허전함.. 허전함을
메꾸기 위해 인터넷에 글 쓰기를 시작했다며, 그것이 비록 밥을 해결할 수가 없
는 일이라 하더라도 당신들이 갖고 있는 도락의 취미처럼 내게도 이런 취미 하
나 있어 삶을 윤택하게 해줄 것이란 생각을 조금이라도 해주었으면 했다.

물론 통신에 글쓰기로 무슨 후광을 입어 지상에 이름 석 자 오르내리는 영광조차
없어 내세울 명분조차 없지만, 그래도 자신 있게 내세울 수가 있는 것은 당신이
염려하는 불륜을 조장하는 채팅은 하지 않는다. 간혹 설레임을 느껴 마음이 기울
어졌던 사람도 있었을 테지만 그것은 누구나 겪을 수 있는 또 하나의 마음이라 여
겼다. 가끔은 그 설렘조차 부럽고 청순해 보였을 만큼 나이가 들었으니...

밥이 나오느냐, 쌀이 나오느냐? 에는 할 말이 없다. 또 채팅의 도사라는 말에 뒤통
수 뜻뜻해 하며 어지럼증을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그 어지럼증을 더욱 부채질한
것은 탓하는 그들이 아니라 글이었다. 내가 글을 좋아하니 글도 나를 좋아하기를
꿈속처럼 기대했는데, 나를 지배하는 것은 글을 써 가슴이 꽉 차 오르는 기쁨이 아
니라 채워도 채워도 채울 수 없는 빈 그릇 같은 허망함이었다. 뜻뜻한 뒷통수 보다
그 스쳐가는 찰라가 얼마나 허망했던지..

기억하고 그리워하던 것들, 그것이 다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잡지 못한 말들에 애
쓰다가 모니터를 켤 때, 그곳에 내 안에 있는 모든 기억들이 살아 숨쉬는 공간이 있
었다. 더러는 혼란스럽고,제어할 수 있는 만큼 억제하다 숨을 쉬던 곳이라 여긴, 나
를 아는 이, 내 기억속에 살아 있는 이, 아무도 돌아 볼 수 없는 내 공간이 있었다.
기일 날, 아프다고 찾지 못한 고향 식구들 대신, 모니터를 차고 앉아 퉁 퉁 부은 얼
굴로 등 돌리고 돌아 앉아, 모니터를 켜는 아내의 등을 향해 아프게 꼽히는 눈길에
'나 절대로 채팅은 안해. 걱정하지 마아..' 라고 중얼거리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