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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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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의 가벼움


BY 개망초꽃 2003-11-04

벗이여!
나는 지금 나뭇잎이 비처럼 내리는 창가에 앉아 있소.
직선으로 세워 놓은 버티칼 사이로 나뭇잎이 힘없이 내리는 걸 보고 있는 중이오.
늦은 아침에 깨어나  밥 맛이 없어서 우유 한 잔으로 밥을 대신했소.
친구가 자전거 타고 호수공원으로 나오라는 걸
준비하고 나가려니 귀찮다고 못나간다고 일축 해 버렸소.
혼자서 호수공원을 돌고 있을 친구에게 미안하기도 했지만
나의 게으름이 친구를 이기고 말았소.


아! 미안.
벗에게 편지를 쓰면서 다른 친구 얘기를 하다 다른 방향으로 흐르려 했소.
창밖은 흑백사진의 잔잔한 음영으로만 느껴지는 지난날인듯하오.
왜냐하면 우리집 창은 동쪽이라 이런 오후엔 흐린날인듯한 착각이 든다오.
회색빛깔을 머금은 앞 베란다는 회색빛으로 창안을 한겹 씌우더니
아파트단지를 한꺼풀 젖셔 놓고선 나무들에게도 흠뻑 회색빛을 묻히고
나뭇잎은 자신이 태어난 땅으로 돌아가고
가지들은 빈 손으로 하늘을 향해 속절없이 마음을 두고 있소.
꼭 나처럼 말이오.
사랑하는 사람 다 떠나보내고,날 찾는 친구 내가 괴롭다는 이유로 만나지 않고,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허무로움만이 날 지배한다오.
왜 11월은 지난날을 떠오르게 하는건지 알다가도 모르겠소.
잔잔하다 했지만 실은 그게 아니란 걸 벗도 알고 있지 않소.
이 놈의 서러움과 외로움은 아무리 먹어도 배부르지 않는 사탕과 같소.
더부룩하고 입맛이 사라지는 텁텁함 그런가 말이오.

이 모든 지난날은 나에게도 책임이 있고,
다른 사람의 과오 역시 나에게 공동의 책임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저 서럽고 억울하다오.
어느 누구도 어느 누군가를 책임질 수 없고 심판할 수 없고,
결국 혼자남아 있는,혼자만이 풀어나갈 수 있는 숙제인 걸 알면서 말이요.

그러나 내가 청승만 떠는 것은 아니오.
밤 늦게까지 일을 하며 바쁘게 살고 있고,
이것이 나의 숙제를 푸는 공식이라 생각했고,벗이 내게 일러준 방법이었소.
바쁘게 살아라,그러면 뒤돌아 볼 시간도 드물어지고 그러다보면 잊혀질거야 이렇게 말하지 않았소?

그리고 또 한가지 슬픔을 씻을 수 있는 건 눈물만큼 후련한 것이 없었소.
안쓰럽다고 혀를 차거나 한숨쉬지 마오.
매일 우는 건 아니니까.

세상에서 제일 가벼운 게 뭔 것 같소.벗이여?
남들은 새의 깃털이다 버섯의 홀씨다 보이지 않는 공기다 하지만...
내가 경험한 바로는 사람의 마음이었소.
사람의 마음은 절대적으로 잡을 수도 없었고,잡혀지지도 않았소.
깃털처럼 만질수도 없었고,홀씨처럼 현미경으로 볼 수 없었고,
공기처럼 가두어 둘 수도 없단말이오.
그래서 사람의 마음이 젤 가볍소.
눈물 얘기하다 정신없게 다른 얘기한다고?
뭐 그럴 수도 있지......내가 요즘 이런다오.
뭔 얘기 하다가 뭔 말을 했지 하고 잊어버리기 일쑤라요.
여하튼 지난날의 사랑은 긴 여운을 남긴 세상에서 제일 가벼운 마음이었소.
그 사람과의 재회와 약속은 현생에선 이룰 수 없는 흑백 이야기였고......
판사 앞에서 대답을 하고 법원을 나와 먼 데 산을 보니
어디로 가야하나? 내 갈 곳은 이제 어딜까? 참으로 막연했었오.
결코 녹녹지도 말랑하지도 않은 세상살이를 혼자서 치워내야 한다니......
기가막히게 막연했었오.

창아래로 보이는 가을은 기가막히게 아름답소.
언제보아도 자연은 변함이 없고 아름답기 그지없소.
세상 밑바닥에 앉아 있는 나같은 사람에게도 자연은 은총을 내리고 있다오.
자연의 풍광이 베푸는 넉넉함은,
가난한 사람에게든 부자인 사람에게든
사랑의 상처로 아픈 사람에게든 사랑의 기쁨으로 행복한 사람에게든
편해없이 골고루 젖셔주고 있소.

노란 기장쌀을 넣은 따스한 밥이 먹고 싶군.
그러나 쌀도 씻지 않고,이리도 게으르고 한심하게 앉아 있소.

이리저리 시간이 가고 세월이 가고,
그러다 잊혀지고,우리가 그렇게 잘 잊혀진 다음.....
지금처럼 11월이 오고 11월이 가고 한 해가 또 무상하게 가면
산다는 건 가벼웠소.
사람의 마음처럼 산다는 것도 만질수도 가두어 둘 수도 없는 가벼운 세월이었소.
이렇듯 힘없는 결론을 내릴지도 모르오.

그럼...이만 써야겠소.
밥을 먹고 싶다고 뇌와 위장과 심장이 날 보채는군.
호수공원에서 친구는 혼자서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지는 가을을 실컷 보고 있을것이오.
나도 친구와 같이 자전거 끌고 나가, 땅으로 돌아가는 가을을 앞에 놓고 앉아,
자판기 커피 한 잔 마시며 시시하고 잡다한 수다라도 떨 걸 그랬소.
아까는 귀찮다고 하더니,
사람의 마음이란 가벼운 존재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