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방울의 무수한 몸부림 소리에 눈이 떴다. 아, 비가 오는구나. 찰나속으로 무수한 기억과 영상과 생각들이 지나갔다. 아침이 오는 시간 아무런 두려움없이 하루의 빈 공간속으로 미끄러들 수 있다면. 어김없이 불안한 갈피를 다독이며 난 콩닥거리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렇게 어김없이 하루는 시작되고 그리고 다시 어둠이 밀려올때까지 나는 종종걸음을 치겠지. 지난 밤 꿈에 난 갓난 아이를 안고 빈 젖을 물리고 있었다. 아이는 근심이라던데 숫제 이제는 갓난쟁이에게 젖을 물리다니 나도 몰래 쿡 웃음이 몰려왔다. 모든 것을 태풍에 맡겨버린 뒤에 오는 어이없는 순진함이라고 할까.
살이 끼었다고 했다. 우리 둘은 무서운 살이 끼었다고 굿을 하라고 했다. 지난 밤 새벽을 등지고 허이허이 올라간 산에서 만난 무당은 그랬다. 단박에 우리 둘의 사주를 들여다 보더니
어떻게 지금까지 견뎌왔냐고 참 용하다고 했다. 이런 살이 끼면 살 수 없다나.
그녀의 말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까. 정말 미친척하고 굿이라도 한 판 해 볼까.
숱한 생각들이 오리무중속에 일었다 스러졌다 한다. 정말 살이껴서 우리가 이렇게 밖에 살 지 못한다면 그것 또한 우리의 숙명으로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무서운 살이 끼었다면 그랬다면 우린 왜 만난 것일까. 그리고 왜 부부라는 인연을 만들 수 있었을까.
지금 모든 것을 내 탓이 아니라 살이 낀 탓으로 돌려버린다면 그렇다면 정말 오롯이 내 삶은 어디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삶이 너무 허망하지 않는가. 내 의지가 아니라 타인의 의지 아니 이미 정해진 운명이 있어 거부할 수 없는 것이라면 이건 너무 허망하다. 나는 무엇이며 사주라는 건 또 무엇인가. 알 수 없는 의문들이 꼬리를 물어왔다.
딸아이가 어디를 다녀왔느냐고 물었다. 나는 아이에게 엄마가 점을 보고 왔다고 말해 버렸다. 아이는 엄마는 그걸 믿느냐고 했다. 믿을 수도 있고 안믿을 수도 있다고 했더니 아이는 입을 삐죽거렸다. 그리고 난 아이에게 말했다. 엄마가 다신 이런 점 같은 거 안 볼거야. 이것이 엄마 생이라면 달게 받아들여야 겠지. 이렇게 자꾸 피하고 두려워하다보면 정말 엄마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될거야. 너 엄마 믿지? 하고 물었더니 아이는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이제 기도 많이 하자. 너 엄마위해서 기도 많이 해다오. 아이는 그러겠노라고 했다.
비가 내리는 소리가 아늑함으로 들려오던 때가 있었든가. 모든소리들에 예민해진 나의 신경줄은 날카로운 칼끝에 몸이 닿이듯 아침 비소리에 바이올린 현처럼 파르르 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