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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방에 슬그머니 고개를 들이밀며..


BY 산아 2003-10-16

에세이방에 슬그머니 고개를 들이밀며..


30대중반에 들어서면서부터 무언지 모르게 내인생의 초초함을 느꼈습니다.
작년 가을부터 아직도 무언가에 열중할수 있는 나를 찾고 싶어 목말라 하던중
다니던 직장에 승진시험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여자보다 남자가 훨씬 더 많은 직장.
일잘하고 똑똑한 여직원보다 덜 성실하고 더 일못해도 남자라는 이유하나로
승진도 빠르고 잘나가는 직장생활에서 시험이라는 평등한 조건에서 당당하게
한번 겨루어 보고 싶었습니다.

 

네 살된 둘째아이를 돌봐주시는 어머님께 한번 도와달라고 했더니
흔쾌이 도와주시겠다고 하시며 아이를 어머님집으로 데리고 가서 주말에만
데리고 오시면서 직장생활하면서 공부하는 며느리를 배려해 주셨습니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와 남편은 집안분위기를 제가 공부할수 있는 조건으로 만들기 위해
저녁이면 텔레비젼도 보지 않고 같이 책을 읽고, 교대로 설것이며 청소등 집안일을 조금씩 도와주기 시작했습니다.

 

오랜만에 엄마가 공부하는 모습을 보는 아이는 엄마가 많이도 자랑스러웠나 봅니다.
아파트 이웃주민들이 \"네 엄마 요새 통 얼굴을 못보겠드라. 어디 가셨니? \"
하고 물으면 \"우리엄마 요즘 승진시험 준비하느라 바빠요\"하면서 광고를 하고 다녔습니다.

 

결혼한지 10여년이 지나고 아이낳아 키우고 직장생활에 정신없이 바빠 한번만이라고
나를 위해 열중하고 싶어 시작한 공부가 이제는 어쩌다 마주치는 이웃주민들의 \"공부 열심히 하여 곡 합격하세요\"하는 소리에 민망해서라도 꼭 합격해야 되겠다는 엉뚱한 욕심도 생겼습니다.

 

공부를 하다가 답답함과 함께 내자신이 스스로 중압감에 견디기 힘들때가 참 많았고
시험은 오백여명이 보지만 합격인원은 그에 7퍼센트니......경쟁률을 내가 과연 뚫어낼수 있을까 ? 괜히 시어머님과 아이들, 그리고 남편만 고생시키는 것은 아닌가?
하면서 포기도 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어느순간 공부하는 내모습이, 목표를 정해놓고 아직도 이렇게 열중할수 있는 시간이 나에게 주어졌다는 것이 행복했습니다.
이제는 시험의 합격여부를 떠나서 아이들에게도 남편에게도 아니 내자신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한번 시작한 일은 끝까지 최선을 다해보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힘들었지만 어쩌면 참으로 행복한 여섯달이 흐르고
시험을 보고 결과가 나왔습니다.
운이 좋았나 봅니다. 상위권이니......

직원들은 아줌마가 집안살림하느라, 직장일하랴, 어떻게 공부를 했냐고 하면서
놀라워했습니다.

 

지금까지 36년을 살아오면서 공부하는 것이 이렇게 행복했던 적은 없었습니다.
\"공부, 시험\"이라는 말만 들어도 머리에 쥐가 나고 스트레스로 위장장애를 일으킬만큼 힘들었던 단어가 올해만큼은 저에게 행복한 시간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에세이방에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며 그동안 저의 일을 적어놓고 보니
괜히 쑥스럽고 이방인 같습니다.

 

아직도 에세이방은 따끈한 시골 온돌방같아 들여만 보아도 마음이 훈훈해지고
나의 생활이 정돈되어 참으로 정감이 갑니다.

 

저 이렇게 다시 에세이방에 발을 들여놓아도 될런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