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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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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의 눈물


BY 녹차향기 2001-01-02

1. 그 여자의..
여자는 오래오래 시계를 쳐다보고 있었다.
시계가 이미 열두시를 넘어섰고 또 다시 분침이 30분,40분을 향해 가는 것에 마음을 졸이고 있었다.
늘 이런 식이다.
늦는다는 전화 달랑 하나 해놓고 목빠지게 사람을 지치도록 기다리게 하는 무심함이 벌써 몇년째이던가?
여자는 남자를 기다리고 있음이 지겨워졌다.
가스레인지에 늦은 커피를 마시기 위해 벨브를 돌리는 순간 딩동 하는 벨소리가 났다.

"여보, 마누라!! 어이구 이쁘기도 하지.
어디 대한민국에 우리 마누라 같이 예쁜 여자 있음 나와보라 그래!!"
늦은 핑계를 대신하며 입에서 쓴 소주냄새가 풀풀 풍겨나왔다.
"으이그... 지겨워.. 조용히 좀 해요. 얘들 깨겠어요..."
"어디 우리 토깽이 같은 새끼들 잘 자는가... 내가 확인해 봐야지.."
아이들 방문을 불쑥 열고는 들어가서 하루 낮새 새로 꺼뭇꺼뭇 수염이자라난 얼굴을 사정없이 부벼댔다.
"아이구... 피곤도 해라.."
하품을 연방 몇 번을 해대더니 거실 쇼파에 쓰러지며 쿠션을 끌어다 머리에 받치기를 잊지 않는다.
"씻고나 자요. 술 먹는 거 지겹지도 않아요?"
남들은 사십이 넘어서니 건강에 신경쓰느랴 헬쓰를 다닌다, 수영을 다닌다, 좀 버는 사람들은 주말마다 공기좋은 곳을 찾아다니며 골프를 한다, 정기적으로 건강검진을 한다 난리들인데 어쩜 당신은 운동이라곤 숨쉬기 운동하고, 밤에 침대에서 하는 팔굽혀펴기 밖에 모르냐며 몇마디를 하고 있는데 헤~ 입을 벌리며 미소띤 얼굴로 잔소리를 듣던 사람입에선 금새 코고는 소리가 요란하였다.

"진짜, 이 사람이... 씻고나 자요.. 제발!!"
소귀에 경 읽기보다 아마 술먹고 자는 사람귀에 경 읽는 일이 훨씬 어려우리라.
여자는 잔소리 하기를 그치고 익숙한 손동작으로 양말을 한짝씩 잡아당기며 벗겨냈다.
종일 얼마나 땀이 났었는지 양말에선 꼬리꼬리한 발냄새와 땀냄새가 겹쳐났다.
"휴~~ 냄새... 참나, 마누라나 되니 이렇게 양말 벗겨주지..."
투덜대면서도 여자는 남자의 발가락을 쳐다보았다.
가지런히 하얀 열개의 발가락이 다정해 보였다.
이번엔 와이셔츠.

삼겹살에 마늘이라도 얹어 먹었는지 입에선 요란한 냄새가 풍겨왔지만 얼마나 고단할까? 하는 측은한 마음에 가만히 머리를 한 번 쓸어주고는 하나씩 하나씩 단추를 풀러내고 있었다.
팔을 하나씩 잡아당겨 와이셔츠를 벗겨내던 여자는 순간 머리속에 거머리가 달라붙는 듯한 현기증을 느꼈다.
시계의 똑딱이는 소리와 가만히 웅얼거리던 텔레비젼의 노래소리가 순간 사라져 버리는 듯한 느낌.
남편의 메리야쓰는 뒤집힌 채 였다.
메리야쓰의 어깨부분의 봉재선이 흉물스럽게 드러나 있었고,
'백양 L 100' 라고 쓰인 상표가 여자의 짧은 스커트 밑으로 드러난 속옷처럼 느끼하게 보였다.
잡아당기다 갑자기 놓는 바람에 남자는 쇼파에서 거실 바닥으로 쿵하고 떨어졌지만 여자의 눈에 남자는 이미 벌레처럼 보였다.
마치 흉물스런 변태중인...


2. 그 남자의..
남자가 새벽 한기에 눈을 떴을 땐 이미 거실에서 요란하게 뻐꾸기 시계가 4번을 울었을 때였다.
아파트라곤 하지만 지은 지 13년이 가까와 온 이 아파트는 부실공사탓인지 아니면 그 동안 보수를 한 번도 하지 않은 탓인지 베란다 쪽에서들어오는 바람이 장난이 아니었다.
바늘 구멍으로 황소바람 들어온다고 그 바람 때문에 거실에 앉아있노라면 코 끝이 싸아하니 시려와 아이들에겐 꼭 이불을 둘러 쓰이곤 했었는데, 알뜰이 지나친 마누라는 차곡차곡 돈을 모아야 한다며 차일피일 미룬 것이 벌써 수년째이다.
하지만, 정말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내가 이렇게 자도록 내버려둘 여자가 결코 아니건만, 머리가 띵해 오면서 속이 메쓱거렸다.
심한 갈증으로 목이 바짝 말라있었다.

비척이며 택시에서 내려 벽을 짚어가며 겨우겨우 집에 찾아들어온 기억만 가물가물 했다.
택시 아저씨가 젊은 사람이 술이 너무 과했군요...라고 한 마디 했건만 따뜻한 자동차의 히터바람에 술이 더 오르고, 잠이 솔솔 와서 아저씨가 다시 흔들어 깨울때에서야 억지로 내린 것 같았다.
그래, 맞아. 거래처 사람들과 마셨었지...
남자는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들여붓듯이 벌컥벌컥 몇 모금을 마시고 나니 금새 컵이 비어서 다시 한잔을 따랐다.
물 따르는 소리와 함께 어디서 흐느끼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
남자는 물 마시기를 멈추고 가만히 소리를 들어 보았다.

그 소리는 아내의 울음소리였다.
얼마나 오랫동안 울고 있었던 것일까?
가끔 너무나 일찍 세상을 등지고 가버리신 아버지를 그리며 저렇게 울은 적이 있었건만, 오늘 이 밤중에 아버지 생각이 불현듯 난 것일까?
남자는 침실문을 비틀었다.
하지만 문은 잠/겨/있/었/다/
한번도 이런 일은 없었다.
내 생각을 얼마나 끔찍하게 해 주는 여자인데, 잔소리도 그저 적당히, 좋은 말도 그저 적당히, 그 적당히란 선을 가장 적당히 지키며 사는 여자인데.....
이상하다..

"여보, 왜 문이 잠겼어? 이봐, 화 난거야? 내가 술 먹구 맨날 늦게 들어온다구? 나 춥다. 거실 추운거 알잖아. 문 좀 열어.."
"............."
울음소리가 뚝 그쳤지만 여전히 문은 열리고 있지 않았다.
"이씨... 나 춥다구. 빨랑 문 열어!!"
남자의 입에선 화가 날 때마다 튀어나오는 '이씨'라는 소리가 예의 걸려나왔다.

"자기 메리야쓰나 좀 쳐다보라구!!!!"


3. 두 사람의...
방에 들어와 여자가 오래오래 울면서 생각한 것은 돌아가신 아버지도 아니었고, 혼자 남아 여러남매 키우느랴고 고생한 엄마 생각도 아니었다.
더 좋은 혼처마다하고, 이 사람이면 날 사랑해 주고, 평생 의지하고 같이 삶을 엮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선택한, 그래서 힘들고 어려운 일이 생겨도 누구에게 투정도 해 보지 않고 이날을 살아온 자기자신에 대한 원망이었다.
그에게 여자가 생겼었다는 걸 왜 미처 몰랐을까?
그렇게 눈치코치가 없었을까?
얼마나 후다닥 일을 치르고 나오느랴고 속옷이 뒤집힌 것 조차 몰랐을까?

저 귀여운 두 딸들은 어쩌지?
오, 귀엽고, 사랑스러운 것들, 너희들이 있었기에 행복하고 즐거웠던 너무나 소중했던 우리의 시간들은 어떻게 된거지?

여자는 그 아이들이 불쌍하고 자신이 속아온 시간들이 억울했다.
이리저리 싸다는 곳을 쫓아다니고, 한 푼이라도 절약하느랴 동동거리며 만원짜리 티셔츠하나 사는 것에 쩔쩔매던 자신의 모습이 머리속에 재방송되었다.
이렇게 구차하게 사는 것, 이런 삶, 지긋지긋하고 넌덜머리가 났다.
"차라리 잘 됐어."
여자는 혼잣말을 하고는 당당하게 문을 박차고 거실로 다시 나갔다.
홀로서리란 결심을 하자 결연한 마음이 들었고 자신감조차 생겼다.

남자는 좁은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워물고 있었던 모양이다.
담배내음이 가득한 베란다문을 여니 고개를 숙인채 작은 의자에 앉아 있는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당신이 뭐라고 변명해도 소용없어요..."
베란다 창 밖으론 한가롭게 비행기가 지나가고 있었다.
이 시간에 어디를 다녀오는 비행기일까?
나도 자유롭게 저렇게 훌훌 날아갈 수 있는 비행기라면.
"왜 진작"
말이 미처 끝나기 전에 남자가 입을 열었다.
"저녁에 거래처 접대가 있었어. 요며칠동안 계속 술약속이 있어서 속도 좋질않구 해서 사실 참석하고 싶진 않았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지. 중요한 거래처거든.
이 저질들을 데리고 2차로 룸싸롱을 갔는데 게임해서 질때마다 옷을 하나씩 벗기로 한거야. 당신 나 베짝 마른 몸 누구에게 보여주기 싫어 옷 벗는거 싫어하는거 알잖아.
결국 메리야쓰까지... 난 진짜 벗기 싫었다구..."

고개를 숙인채 말하고 있는 남편의 눈에서 닭똥같이 굵은 눈물이 뚝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