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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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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지통 비우기(B)


BY allbaro 2001-07-14

휴지통 비우기(B)

툭툭거리는 발소리를 내며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을 따라 헝겁인형
같은 모습으로 문을 들어섰을 때, 낯선 얼굴들이 바라보고 있었다.
웬지 모르게 당황한 듯한 얼굴이었고 나도 그들이 편안하지 않게 느
껴졌다. 그래서 이들이 신참인 것을 알았다. 사장님은 어디 가셨나?
네 잠시 이 근처에… 곧 오실 겁니다. 그렇게 나의 위치를 일단 정하
여 두고, 일행은 자리에 앉았다. 예전에 뮤지션들이 북적이던 이곳은
조금은 어색하게 떠있는 듯한, 그러니까 이가 물리지 않은 톱니 같은
모습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몇 년전 처음으로 이곳의 문을 열었을
때는 이곳저곳에서 헤드 뱅잉을 하는 사람들이 자신만의 음악 세계
에 심취하여 있었고, 묘한 머리색의, 나는 연주깨나 하지! 라고 웅변
처럼 말하는 인상의 사람들이 서로 귀에다가 입을 박고 이야기들을
나누곤 하였다. 30 Cm만 떨어져도 이야기는 단어가 아닌 잡음이 되었
고 75%의 이야기들은 서로 알아듣지 못하였다. 그래도 대화는 끊임
없이 이어지고 누구도 소리 좀 줄여! 라고 외치는 사람은 없었다. 그
냥 약간의 미소와 약간의 심각한 표정으로 알고있지! 하는 표정만 지
으면 되는 것이었다. 묘하게 퇴폐적미고 관능적인 여인들이 장어 같
은 허리를 미끄럽게 천천히 움직이며 걸어 다녔고, 끌어 안고 있는
것이라든가, 구석 자리에서 심폐 소생술같이 긴 호흡의 키스를 나누
는 연인들의 모습도 신기한 것은 아니었다. 모두들 데킬라에 적당히
절여져 있었고, 때로는 소파위의 남자위에 올라 앉아 한번쯤 쳐다 볼
만한 뜨거운 장면을 연출하는 대담한 여인으로 구성된 커플들도 있
었다. 적당히 취했고 적당히 즐거웠고, 적당히 시끄러웠다. 담배 연기
는 공간을 떠돌고 Rock은 데킬라에 녹아 들었다.

문이 열리고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설 때, 대부분 세가지의 표정을 문
안으로 밀어 넣는다. 공간의 문을 열면 이내 인상을 조금 찌푸리면서
다시 뒷걸음을 치는 사람들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이곳에는 출입금지인
것이다. 그들에게 이곳은 너무 시끄럽고, 너무 어두우며, 담배 연기
가득한 악다구리의 소굴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세련되고 깔끔한 압구
정동의 Bar를 찾다가 기겁을 하고 돌아 나가게 된 가여운 영혼에 지
나지 않는다는 것은 모두 다 알고 있으므로 어서 오세요 라든가, 왜
가세요? 라는 말 따위는 아무도 하지 않는다. 먼저 환하게 미소지으
며 두리번 거리는 사람들은 단골이다. 이들은 아는 얼굴들을 찾는 것
이다. 어 형! 이라든가, 왔어요? 라든가 그렇게 일상적인 인사로 그들
이 이 공간과 무관하지 않다는 표시를 하는 것이다. 호기심 어린 표
정으로 조심스러운 발걸음을 옮기는 사람들은 늘 누군가의 뒤를 따
라온다. 이곳은 아무나에게 열려져 있지는 않은 것이다. 거기 한번
가보자! 라고 누군가의 유혹을 받고 그럼 한번! 하는 마음으로 따라
온 사람들이며 이런 사람들은 20분만 지나면 공간안의 모든 사람을
알게된다. 심지어 주방에서 일하는 친구까지 나와서 인사를 나누고
악수를 하고 다음번엔 분명히 기억을 하고 아는 체를 해 주는 것이
다. 아! 이친구는 디자인 하는 친구예요. 인사드려라. 네 만나서 반가
워요… 그렇게 돌아가며 몇 번만 인사를 하면 이내 10년 지기 같은
몸짓으로 어깨를 툭툭치며 정다워 진다. 이들은 Code가 맞는 것이다.

그렇게 같은 무리에 속한다는 것이 확인 되면 서로 코를 들이박고
또 가벼운 이야기를 나눈다. 낡고 색바랜 LP로 가득한 이 공간은 약
간의 권위를 지니고 있고, 어지간한 곡들은 모두 CD를 거부한다.
Dave Matthews Band 와 Neil Young 이 협연한 All Along the
Watchtower 를 들어 보았냐? 라든가, Eric Dolphy 의 Out There 앨범에
대한 이야기들이 떠 돈다. Pat Metheny Group 의 The Awakening 나
peter gabriel 의 Games Without Frontiers 같은 곡들이 공간에 머물면 그
때는 여하튼 이야기를 조금 더 잘 할 만큼은 조용해 지는 것이다. 누
구든 음악에 대하여서는 조금은 알고 있어야 하고 그것은 이 공간의
입장권 같은 것이었다. 그러면 바위에 붙어있는 따개비 같은 연인들
도 서로의 입에서 자신의 입을 간신히 떼어내고 드디어는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그리고 어! 형 오셨네요. 그래 임마 재미 좋구나. 쟤는
누구니? 새로 모델 일을 시작한대요. 그렇군. 그런 것은 이미 말하지
않아도 알게 된다. 모델 같은 다리와 모델 같은 허리와 적당하게 단
단한 엉덩이를 가지고 있고, 자신의 안목을 드러내는 옷을 입고 있으
니까 쉽게 알 수 있는 것이다. 나의 쟤 누구지? 하는 질문에는 그전
의 걔는 어디에 있냐는 의미의 질문이다. 쫑 났어요. 깨끗하게요. 벤
츠탄 놈이랑 다니더라구요. 벤츠는 무엇이든지 먹어 치운다. 검은 S
클래스의 벤츠에는 지치지 않는 식욕이 있는 것이다. 끈적한 욕망과
검은 가방의 현금과 가녀린 여인들을 먹어치우는 것이다. 싱가폴의
전시장에서 처음 기이하게 뚱뚱한 S씨리즈 벤츠를 보았을 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벤츠의 식성이라면 그 정도라야 하는 것이다.

간략하게 정리하면 모델일을 시작하는 여자친구가 그쪽의 관계자인
이 친구와 사귀게 되었고, 한동안 FireBird에서 머리카락을 날리며 이
곳저곳을 쏘다니다가 어느새 검은 벤츠의 사나이에게 가버렸고, 이
친구는 또 다른 풋내기를 다시 사귀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이틀 쯤
전에 만났고, 오늘은 이미 뜨거운 연인이고, 아마도 다음주 쯤엔 또
다른 검은 벤츠에게 보내 버릴 지도 모른다. 흔한 이야기고 늘 그런
것이다. 다음주 중엔 또 다른 풋내기를 내게 인사해! 하며 소개 할지
도 모르고 그녀들이 내뿜는 강한 향수와 쪼그만 얼굴에 깔려 있는
그녀들의 엉덩이 만큼이나 단단한 자신감과 쭈욱 뻗은 곧은 다리와
함께 3분쯤 기억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 이상은 낭비다. 분명한
낭비인 것이다.

언젠가 형 쟤 누구예요? 괜찮다아... 라는 질문이 비틀거리며 화장실
을 다녀오는 내게로 조심스럽게 날아왔고, 형수님이야! 말조심하라구
… 하는 소리가 나의 왼편에 있던 또다른 친구로 부터 날아 갔다. 그
러니까 그녀는 그속에 내재 되어 있던 여인들과 묘하게도 달랐고 묘
하게도 닮아 있었으므로 그런쪽에는 민감한 이 친구들은 감은 잡았
으되 Cool한 답을 얻지는 못한 것이었다. 그녀는 새가 지저귀는 것
같은 음성으로 인사를 나누었고 역시 20분 이내에 모두들 알게 되었
다. 음악이 좀더 신경쓴 것으로 스피커를 기어 나오는 것을 느꼈고,
97% 내 Code와 맞아 떨어지고 있었다. 그녀는 이곳의 지나치게
Rock적인 분위기가 마음에 든다는 것을 아름답게 웃고 있는 입꼬리
로 내게 알려 주었고, 곧 가늘고 덩굴식물 같이 하얀 두팔을 머리위
로 곧게 올리고 긴 머리카락을 얼굴위로 흩날리면서, 장어 같은 허리
로 우아하게 춤을 추었다. 네온이 반짝이며 그녀를 사라지고 존재하
게 만들었다. Bar의 눈동자들은 그녀를 ?고 있었고, 그 순간 세상은
그녀를 중심으로 자전하고 있었다. 데킬라 슬래머는 탁자를 뽀갤 듯
이 큰 소리를 외쳤고, 잔을 덮은 냅킨은 곧 술에 만취하여 천장으로
날아가 붙었다. 설설 끓는 뜨거움으로 다가온 그녀는 내게 입술을 던
졌고 나는 인공호흡을 하는 자세가 되었다. 데일만큼 뜨거운 입술이
었고 수치심 없는 입술이었다. 언제나 스르르 힘이 풀리곤 하는 그런
입술이었다는 것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틀림없이 내 입술에는
그 때 입은 화상의 상흔이 있는 것이다.

어쩐지 곰팡이가 되어 버린듯한 구석진 우울의 토요일이었다. 약속장
소를 일부러 압구정동으로 고른 것은 한번쯤 지난 시간으로 돌아 가
보고 싶은 마음이 생겨났기 때문이었다. 거리엔 바람이 일고 있었고,
나는 그녀의 눈동자와 비슷한 눈동자의 여인을 다섯 명쯤 보았고, 그
녀의 다리와 비슷한 여인들이 핫 팬츠를 입고 지나가는 것을 일곱
명쯤 보았다, 1도의 어긋남도 없이 곧은 다리였다. 뽀얗게 눈이 부셨
고, 발찌가 달랑이고 있었다. 그중의 세 명은 아주 확실하게 아름다
운 다리였다. 그리고 그녀들은 늘 장어같이 흐느적 거리면서 걷는다.
워킹스쿨에서 가르친 것은 아닐텐데, 그렇게 수 많은 남자들의 시선
을 허리에 걸고 하여튼 장어 같이 미끌거리면서 걷는 것이다. 잠시
이 근처에… 갔던 주인이 돌아왔다. 와아! 형… 오랜만이네요. 그는
특유의 작은 눈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는 듯한 웃음으로 인사를 건넸
다. 그리고 함께 어깨를 잡고 그가 준 안부를 돌려 주었다, J&B로
칙칙폭폭주를 준비해 주었다. 술 습관을 비롯하여, 그는 내게 대한
것들을 대부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이제 사실이 아닌 진
실한 박제가 되어 버렸으므로, 지나간 정보라는 빛 바래고 누렇게 떠
가는 기억이 되어 버린 것들이다. 몇 잔의 술잔이 돌아 갔을 때 그는
나의 오른쪽에 와서 형 그런데… 라고 그와 나 사이의 공간이 조그
맣게 움츠려드는 듯하게 말을 건넸다. 거기까지! 됐어… 나는 그의
말을 막았다.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이미 알고 있었고, 그것은 낭
비였다. 분명히 기억과 시간과 뇌의 낭비였기 때문이었다.


기억의 휴지통 비우기를 해야 하나?
세 그루의 소나무 아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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