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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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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당신


BY 무소유 2003-09-05

오빠는 술을 올리고 절을 한 다음 담배 한 개비(蓋皮)를 태워 무덤 위에 놓는다.  옆 산소(山所)의 가족은 무척이나 부지런한 이인지, 마른풀 내음이 향긋하다.  윙, 윙 예취기 돌아가는 소리가 정겹다. 햇살이 따가워 오빠의 얼굴은 연신 땀이흐른다. 나는 갈퀴를 가지고 풀들을 한쪽으로 모아둔다.  메뚜기가 톡, 톡 튀며 날아가고 나무에서 떨어진 밤송이는 굵은 알밤이 반쯤 벌어져있다.  나는 두 발을 모두어 밤송이를 발로 까보았는데 서툴러서 잘 까지지 않는다.

"오빠, 보면 안될까?"
"뭘?"
"할아버지 보고싶어"
"보지마"
"......."
"보고싶은데"
"여자들은 안 보는 게 좋아"
"그래두... 안 무서워"
"........."
오빠는 대답이 없다.
3년 전에 외할아버지 묘(墓)를 이장(移葬)하는 날이었다 작고(作故)하신 지 벌써 20여 년이
흘렀고 항상 마음에 담았던 할아버지였기에, 또 이런 기회는 오지 않을 것 같아서 나는 보고싶어 했지만 오빠는 말없음으로 보는 것을 말렸다. 그래도 어머니가 말씀하실 때는 아무 말 없이 참관(參觀)하시게 하는 것이다. 할아버지 유골을 보는 순간 '아이고~오 아버지...'로 시작한 어머니는 곡(哭)을 하시며 대(代)를 이을 아들이 없이 가셔야 했던 할아버지의 설움을 슬피 우신다.
"엄마, 할아버지... 어떠셨어?"
"깨끗하게 잘 계셨더라..."
"뼈는 어떻게 돼있었어?"
"응, 큰 뼈만 남아있었어"
"............."

내가 세 살 되던 해에 집에 불이 났다 했다. 한강변 가까이에 살던 집은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불이 났고 집을 다시 지어야했는데 어머니는 잠시 우리 4남매를 외할아버지 댁에 맡겨야했다.  집이 다 지어지고 데려오기 위해 내려갔었는데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나를 가지못하게 하셨던 것이다. 할머니는 내 어머니와 이모를 낳으시고 아들이 있었는데 아들이 귀하려고 했는지 태어난 지 백일이 되던 날, 그만 백일해로 떠나 보내셨단다. 그 후에 후사(後嗣)를 보시기 위해 작은할머니를 몇 분 얻으셨지만 끝내 손(後孫)을 보지 못하셨던 것이다. 예전에는 지금처럼 교통이 좋질 못했고 시절이 어려웠던 터라 서울에 살던 딸들이 친정에 왔다가는 것이 참 힘들었다고 했다. 두 분이 사시기에 적적하셨는지 나를 데려가지 못하게 하신 것이다.
그렇게 나는 내 유년을 두 분과 함께 보내게 된다.

난방(煖房)이 땔감으로 사용했던 터라 가을에 할아버지는 산으로 나무를 하러 다니셨는데
나를 지게 위에 태우고 가시는 것을 좋아하셨다. 흔들거리는 지게 위에서 바라보는 황금빛
들녘과 코스모스, 흥얼흥얼 노랠 부르시며 간간이 지게 위에 앉아있는 손녀를 확인하시는
할아버지.. "맹희야(^-^ㆀ). 오늘은 핵교에서 뭣을 배왔냐... 인자는 틀린 글자는 읍것제?" 혹은 "선상님이 우리 맹희 이뻐 허시지야?" "응, 하나씨(할아버지).. 오늘은 숙자랑 땅따먹기 했는데 내 땅이 젤 컸다?!", "그랴... 우리 맹희 밥도 잘묵고... 공부도 열심히 혀야쓴다이~" 산에
다다르면 할아버지는 맹감, 아그배, 깨끔, 도토리, 상수리 그리고 아지못할 열매들을 먼저
낫으로 베어주시고는 나무를 하셨다. 나는 할아버지가 나무를 다 하시는 동안 놀면서 그 열매들을 따서 쇠곽에 담았다. 나무들이 마르며나는 마른풀 내음... 나무를 다 하시면 나는 할아버지 앞서 잰걸음으로 달려오곤 했다.

농촌이라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일찍 들에 나가셔야 했는데 두 분이 내 옆에서 주무시고 계시겠거니 자고 있다가 눈을 떠보면 해는 벌써 중천에 떠 있고 옆구리께는 왼쪽에는 할아버지
배게, 오른쪽에는 할머니 배게가 꼬옥 붙어있었다. 내가 가장 좋아했던 것은 가마솥에서 밥을 푸고 난 후 누룽지를 긁어내기 전에 반쯤 닳아진 놋수저로 누룽지 위를 삭~삭~긁으면 보드라운 누룽지가 긁어지는데 그것을 뭉쳐서 누룽지 주먹밥을 만들어 주시는 것이다.
할아버지께서 잔칫집에 가시는 날이면 꼭 한가치(손수건)에 꼬막2개, 무지개 떡 2개, 강정 2개, 간혹 수리미(오징어)도 들어있었고 어떤 날은 희고 단단한 눈깔사탕이 들어있을 때는 내 입은 함박만해지곤 했다. 개수를 세시는지 딱 두 개씩 들어있던 한가치 속에는 가끔 담배가루가 섞여 있었는데 유난히 입이 짧았던 나는 흰떡 외에는(눈깔사탕은 제외 ^^) 손을 대지 않았지만 할아버지가 잔칫집에 가시는 날에는 할아버지가 기다려지는 것이다.

붉게 타오르던 진달래 꽃. 친구와 바구니 가득 쑥을 캐었는데 더 캘 욕심에 땅을 파서 묻어두고 표시를 해두었지만 나중에는 묻어둔 곳을 찾지 못해 돌아서던 아쉬움. 가물(가뭄)었던 논에서 사람의 발자국 속에 모여들던 올챙이. 가을철 톡, 톡 튀어 달아나던 메뚜기를 잡아서 댓 병 속에 담아와서 구워먹던 메뚜기 맛, 추수가 끝난 논에는 동그랗게 뚫린 구멍이 많았는데 그 속에 손가락을 넣으면 잡혀지던 우렁이의 감촉, 뉘엿뉘엿 해질 녘엔 뛰어오르던 물고기 떼. 자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맑은 개울가에서 잡았던 다슬기와 개앙조개들(재첩). 어둠이 내리기 전 자욱하게 깔리던 밥짓는 연기, 밥을 퍼담기 위해 솥뚜껑을 열 때 후욱~끼치던 밥 내음새, 밥 위에 올려서 찐 조기찌개의 맛. 그리고 12살이 되던 해에 공부를 위해 서울로 올라와야 했는데 기차에 오르며 손을 흔들 때, 점점 멀어지던 두 분의 영상(映像)을....나는 잊지못한다.

내 사랑의 원천이셨던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 저물어 가는 들판에서, 어느 길모퉁이에서
지팡이를 짚고 걸어가는 노인의 모습에서 나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본다. 유년의 기억들이
성인이 된 지금까지도 가슴속에 늘 행복감으로 남아 모든 일에 감사할 수 있는 너그러움을
키우기에 충분한 것이 되었다. 손녀딸에게 주신 그 사랑이 자양분 (滋養分)이 되어 더 많은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기를...

"아까워...."
"뭘?"
"할아버지 뵐 수 있었는데..."
"에비!! 그러고 할아버지가 나타나시면 어쩔래?"
오빠는 눈을 크게 뜨고 놀래키는 흉내를 내며 웃는데 이(齒牙)가 고르다.
오늘은 벌초하기에 '딱' 좋은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