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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골에 작은 예배당


BY 개망초꽃 2003-08-25

새로운 손님이 오시면 포인트 카드를 만들어 드린다.
메모지에다 성명과 전화번호를 적으시면
초록색 포인트 카드와 아침에 옥사과 즙 한 봉지가 써비스로 나간다.

매장을 시작하고 처음 맞는 봄 어느날
키가 크고 미인인 새로운 손님이 오셨다.
포인트 카드를 만들기 위해
성명을 적어달라고 했다.

"고향"
손님은 자신의 이름을 적으면서 본명이예요 하셨다.
"그러세요. 너무 멋지고 아름다운 이름이시네요."
성이 "고"씨요 이름이 "향"이였다.
멋지고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분에게 상을 준다면 당연히 "고향"이라 호적에 올라간
이분 이름에게 드리고 싶다.

고향의 기억을 물씬 풍기게하는 그 분을 볼 때마다
고향을 향한 향수에 젖어 매장 너머 창만큼만한 하늘을 바라본다.

고향엔 동네에서 하나뿐인 예배당이 있었다.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에서 백미터쯤 가면 언덕위에 작은 예배당이
인자하게 소박한 마을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예배당으로 올라가는 길 초입엔 목사님 사택이 있었고
교회로 올라가는 길엔
여름엔 채송화가 맨 앞에 피고 그 뒤에 분꽃이 피고 그 옆엔 봉선화가 피고
그 그 옆엔 백일홍이 백일동안 시들지 않고 끈질기게 피어 있었다.
그 뒤엔 키다리 해바라기가 앞에 핀 꽃들의 울타리가 돼 주었고...

가을엔 코스모스와 과꽃이 예배당을 안내하고
봄엔 아카시아 꽃이 예배당 주변에 구름처럼 피어났다.
그 향기로움과 그 꽃의 맛...
봄이면 목사님 말씀이 우선이 아닌

아카시아 꽃 때문에 갔었는지 어쨌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아카시아 꽃이 한창인 오월이면 나무에 메달려 배가 부르도록 아카시아꽃을 따 먹었다.
포도송이 같이 달린 아카시아 꽃을 한송이 똑 따서는
입속에 쏙 넣고 한번에 훑어 먹었다.

내가 예배당에 나간 건 순전히 우리 엄마가 다녔기 때문이다.
우리 엄마가 예배당에 가시게 된 건 순전히 돌아가신 우리 아빠 때문이였다.

아버지가 돌아 가시기 한달전에
느닷없이 밑도 끝도 없이 목사님을 모셔 오라고 하셨단다.
내가 죽을 때가 되었으니까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야 천국에 갈 수 있다시며...
이런 큰 이유로 우리 엄마부터 이모 외할머니 나와 내동생들까지
일요일이면 예배당엘 산을 하나 넘어 걸어 다녔다.

암튼 믿음이 있어서도 아니고 지옥에 떨어질까봐 무서워서도 아니고
그냥 친척들이 다 다니니까 열심히 다녔다.

비가 와도 다녔고 눈이 와도 다녔고 어두운 밤엔 후레쉬를 어지럽게 비취며 다녔다.

신작로를 걸을때도 달이 따라오고 산고개를 넘어서도 달이 따라왔다.
달빛을 받아 달맞이 꽃이 가로등 같았던 오솔길.
새가 지져귀고 짐승이 울던 산길.

맨 앞에 걸어가는 동네 오빠손에 들린 단 하나의 후레쉬로
나도 동생도 넘어지지 않고 힘들다고 업어달라 말도 않하고 그 먼길을 다녔다.
아버지가 신신당부하신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는 그 말씀에
그래서 하나님의 생명의 책에 우리 이름이 적혀 지옥으로 떨어지지 않고
슬픔도 고단함도 미움도 성냄도 가난도 없는 천당에 들어갈 수 있다는 그 말씀에
우리 식구들은 예배당엘 열심히 갔다.

예배당은 지금으로 봐서는 절대 작았지만 그때 당시에는 넓고 높았다.
동네에 하나뿐인 예배당엘 들어가려면 신발을 벗고 들어가야한다.
밤색 나무 바닥 가운데를 중심으로 왼쪽엔 남자석이고
오른쪽은 여자만 앉아야했다.
부부도 들어갈땐 갈라져서 들어갔고
남매도 떨어져서 앉았고.
부모 자식간에도 초등학교만 되면 남녀 구별을 하고 앉았다.

성탄절 때는 독무를 했었는데,초등학교 2,3학년때로 기억한다.
아버지도 없는 조카딸이 혼자 무용을 한다고 해서 객지에 사시선 삼촌까지
강원도 깡촌으로 버스를 몇번씩 갉아 타시고 오셨다.
유난히 추운 산촌의 겨울밤 색동 한복을 입고
"그 어리신 예수 눌 자리없어 아름다우신 몸이 구유에 있네~~"
이 찬송가에 맞춰 코를 훌쩍거리며 춤을 추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고향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착하고 순진하게 서 있던 예배당은
성인이 되어 고향을 찾아 가니 예배당은 발그스레한 색으로 화장을 하고 있었다.
교회탑도 높아져 있었고 창문살은 붉은 연지를 바른듯 했다.

고향이라 이름 붙여진 손님을 대할 때나
가끔씩 내가 살고 있는 이곳에 커다란 교회를 갈 때면
언덕위에 착하게 앉아 있던 작은 예배당이 생각난다.

계절마다 피고 지는 꽃도...
어지럽던 후레쉬 불빛도...
달을 쳐다보며 무서움을 달래던 산길도...
예배당과 함께 잔잔하게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