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시인 유치환님을 아시죠?
그분의 주옥같은 서간집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 가 어떻게 탄생됐나 아시는 지요.
오늘 아침 신문(국제신문)에 신태범의 부산문화 野史에 시인 유치환과 이영도의 지난 얘기가 실렸습니다.
지금은 고인이 된 두분이지만 그분들의 사랑은 아직도 우리 가슴에 남아있습니다..
저는 이글을 읽고 두분의 아름다운 사랑에 가슴이 두근거리고 이루어 질수 없었던 사랑에 가슴 에이는 듯하지만 한켠으론 뒤통수 한대 맞은 멍한 기분입니다.
그리고 알수 없는 가슴답답함이 남네요..
또한 알지도 못하는 청마의 부인. 같은 여자로서 그분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생각하지 않을 수 가 없습니다.
시를 잘 모르는 저도 남들처럼 한때 그분의 시를 애송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오늘 유치환님에 대해 생각해보는 하루가 될것같습니다.
[[1946년 통영여고 교무실에 새로 부임한 여선생이 고참선생 자리를 돌며 인사를 올리고 있었다.
당시 통영여고에는 청마 유치환 작곡가 윤이상 화가 전혁림등이 있어 문예여고라 불려지고 있었다.
유치환(청마) 이영도(정운) 운명적인 사랑은 그때 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정운은 결혼한지 한달만에 사별하고 외동딸을 키우며 외로운 청상의 삶을 맑은 詩心으로 승화시키고 있었고 유치환은 그때 나이 39살 부인과 세딸을 둔 유부남 이었다
그러나 두사람은 각자의 엄존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조심스럽게 서로에게 다가섰다. 그들의 사랑은 뜨거우나 성결했다.
이영도에게 첫눈에 반한 청마는 이때부터 이룰 수 없는 사랑의 목마름으로 열병을 앓듯 이영도에게 편지를 써 보내기 시작한다.
두사람의 안타까운 격랑속에서도 만남과 이별을 거듭하며 20년간 연실같이 이어진다.
청마가 1967년 불의의 교통사고로 운명하기까지 정운에게 보낸 연서는 무려 5000 여통. 6.25전쟁이전의 것은 모두 불태우고 이후에 보낸 편지만 그랬다.
줄잡아 17년간 1년에 300여통. 거의 매일 연서를 보낸셈이다.
아마도 이렇게 많고 기나긴 연서를 쓴 사람은 인류역사상 전무후무할 것이다.
청마를 잃은 후 상심의 나날을 보내던 정운이 청마의 연서를 간추려 [사랑하였으로 행복하였네라]라는 서간집을 출간했고 이 서간집은 엄청난 화제를 불러일으키며 베스트 셀러가 되었다.
특히 표제가 된 청마의 [행복]은 연애편지의 교과서처럼 애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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