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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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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섬진강, 지리산.... 이름만 들어도 설레이던 그모든것을 지나쳐~


BY 불꽃같은 인생 2003-07-31


내가 찾아야 할것은...


  늦은 아침이 분주하다. 잠결에 들었던 세찬 빗소리가 상차리는 순간에도 여전하기만 한 것이다. 안면도에 갔다가 잠깐 들린 시누이네가 있어서 여유를 부리는척 했지만, 내심 장마가 끝났다던 일기예보에 화가남이 어쩔수가 없다. 그래도 일년동안 틀어박혀 있던 집에서 벗어나 경험해보지 못한 낯선 도시와 바다를 향해 떠난다는 사실에, 어떤 악조건도 감당해낼 여유와 용기가 충전되어 손놀림이 바쁘다. 좁은 집에서 북닥이던 가족들이 모두 각자의 짐을 챙긴후 시누이네는 시골(경북 상주)로, 우리 가족은 남해(경남 상주)로 같은 지역명을 가진 도시로 동시에 출발을 했다.
  '상주가 지겹지도 않아요? 휴가도 상주로 가게...' 시누이의 말을 듣고보니 별생각없던 나도 고향을 벗어날 수 없는 촌놈임에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대전에서 통영까지 이어지는 고속도로를 달리는 동안, 뒷좌석에서 장난질을 치다가 지겨운지 아이들이 언제 도착하느냐며 성화를 부린다. 많이 수그러진 빗줄기도 어느새 남쪽으로 내려올수록 사라져갔다. 인간의 편리를 위해서 설계된 이 길에, 사계절의 태양빛을 모두 받으며 흘린 땀방울이 얼마만큼인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저 목적지에 빨리 갈 수 있음에 감사하면서도, 둘곳 없는 시선을 가누지 못해 졸음을 참을 뿐이다. 집에 읽지 않은 책들을 쌓아두고 한권도 챙겨오지 못함이 내내 아쉬워서 꾸벅꾸벅 고개를 떨구다 보니 어느덧 진주분기점을 통과해서 남해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휴게소의 아저씨가 남도의 정겨운 사투리와 함께 자세한 안내를 해주셔서 진교 IC를 지나 길옆 상점들에 쌓인 마늘을 구경하다보니 어느새 남해대교 앞에 서게 되었다. 두시간 반남짓 걸려서 드디어 남해의 절경이 시작되는 관문이라는 아름다운 현수교(상판의 양쪽끝에 탑을 올리고 탑과 탑사이에 적당하게 케이블을 늘어뜨린 것이며 양쪽 탑 사이에 교각을 놓지못할 만큼 강이나 바다가 깊을 때 이용한다.)에 도착한 것이다. 남해대교는 한국 최초의 현수교(懸垂橋)로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다운 경관을 보여준다. 어릴적 교과서속의 사진을 보면서 상상했던 길이만큼 충분히 달릴 거리는 아니었지만, 바다의 향기를 느끼고 남해에서의 추억을 더듬을 첫 얼굴의 역할로는 충분했다. 벚꽃필때 너무나 아름답다는 가로수가 즐비한 길을 지나고, 수 많은 관광안내판으로 눈요기하면서 삼십분이상을 달려 항상 가슴속에 있는 지명인 상주(尙州) 해수욕장에 도착했다. 민박집을 정하고 짐을 들여놓는 동안 아이들은 바다를 향해 달려가고 싶어서 안달이 났다. 어찌 그러지 않겠는가! 그 먼길을 애타도록 세시간이 넘게 달려서 왔으니 한순간이라도 빨리 풍덩하고 싶을테지...
  늦은 점심을 먹은 뒤 수영복입고 각종 장비를 챙겨서 바다로 나갔다. 민박촌과 솔밭을 잇는 다리가 있고 솔밭아래로 체에 거른 것 같은 고운 모래가 끝없이 펼쳐있었다. 작년 동해의 맑은 바다를 보고온후 자주 가리라 다짐했었는데도 일년만에 찾은 모래사장이다. 비온뒤라 바닷물도 차갑고 바람도 살랑살랑 불어서 한기가 느껴졌는데도, 신이난 아이들과 남편은 밀물이 들어와 자꾸만 파라솔을 뒤로 옮겨 놓아야 하는 나를 완전히 잊어버린 듯 했다. 파라솔아래 돗자리를 깔고 썬캡을 눌러쓴뒤 고운 보료위에 누운 나도 부러울 것 하나 없는 가장 행복한 여행객이었다.
  해수욕장 뒷편으로 금산(錦山)의 숨겨진 절경, 왼편으로 구불구불 고갯길을 내려오는 승용차와 백사장을 안고있는 송림, 정면의 바다에 떠있는 자그마한 나무섬과 돌섬! 어느곳을 둘러보아도 도시의 삭막함과 불안은 없었다. 그저 평화로움과 자애로움, 그것만이 있었다.
  민박집으로 돌아오다보니 민박촌을 연결해주는 구름다리 아래에도 바닷물이 밀려와 시커먼 물살이 넘실대고 있었다. 저녁을 먹은후 일찌감치 곯아떨어진 아이들을 남겨두고 남편과 산책을 나갔다. 화려한 불빛의 먹거리터에서는 각종음식들이 지글거리고 있었고, 바이킹과 원형디스코 놀이기구에서는 사람들의 즐거운 비명소리가 솔바람을 가르고 있었다.
  우리가 잡은 민박촌은 금전마을이라는 맨 끝자락에 있는 곳이었다. 중간의 상주마을은 바다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고 임촌마을은 해수욕장의 입구가 있고 주차장이 있는 곳이다. 마을의 앞쪽으로 각종 먹거리장터가 열려있었고, 다리를 건너 해수욕장을 향하면 솔밭이 있거나 야영장이 있으며 그 아래로 모래사장이 원형을 그리며 길게 놓여 있었다. 유람선이 있는 상주선착장까지 산책하는 동안 말없는 대화를 나누며 행복한 한컷의 영화를 찍었다. 선상카페에서 여가수가 부르는 노랫소리가 파도소리에 묻혀질때쯤, 또하나의 길거리 카페에서는 필리핀에서 온 자그마한 얼굴의 여자가 우리를 위해서인 듯 'Beautyful Sunday'를 흥겹게 불러주었다. 정말 노래제목 같은 아름다운 일요일밤이었다.
  다음날 아침 부랴부랴 밥을 먹은뒤, 10시에 출발하는 '러브크루져'라는 이름의 배를 타고 한려수도의 크고작은 섬들을 구경했다. 언젠가 TV에서 무인도의 심각한 생태파괴를 방영한적이 있었는데, 그것은 사람들이 풀어놓은 토끼나 염소등에 의한 것이었다. 벼랑 끝에서 먹이를 찾아 헤매는 무인도의 그러한 염소도 보았고, 용왕이 승천하면서 만들어졌다는 비룡계곡, 사랑의 바위(할머니, 할아버지바위)의 전설과 거북동굴, 용바위, 돌섬, 또한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섬의 주민들이 목욕하는 날은 비오는 날이라는 안내방송에는 웃음이 나기도 했다. 배가 지나가는 자리마다 파도가 갈라지며 하얀 뱃살을 드러냈고, 무심한 눈길도 붙잡는 은빛 반짝임이 눈을 뜰 수 없을만큼 강렬했다. 한시간 사십분 정도의 시간동안 남해의 크고작은 섬들을 보고, 설명듣고 감탄했다.
  오후시간은 해수욕을 하면서 감자도 쪄먹고 추위에 새파래진 아이들을 모래사장에 묻어주기도 하면서 보냈다. 유독 핫도그를 파는 아줌마들이 많았는데, 한기에 지치고 해수욕에 지친 아이들의 간식에는 그만이라, 여름에 핫도그를 파는게 이상하다 생각했던 의문은 금새 풀렸다.
  저녁무렵부터 조금씩 뿌리던 빗줄기에도 아랑곳않고 민박집 옥상에서 고기를 구워먹은뒤 마지막 해변의 밤을 보기 위해 백사장을 향했다. 지역방송국에서 설치한 무대에서는 노래자랑이 한창이었고, 늦게 나서서인지 사람들 숲에 가려 구경을 할 수 없었기에 바다를 향해 돌아섰는데, 유람선이 선착장에 있지않고 눈앞의 바다에 와 있었다. 9시가 되자 유람선에서 축포를 터뜨리기 시작했는데, 하늘을 향해 솟아오른 불꽃섬광들이 여행객들의 환호성을 자아내게 했다. 빗줄기처럼 쏟아져 내리는 황금빛, 푸른빛, 보랏빛의 불꽃들이, 긴 연기를 드리우며 바다를 찾은 사람들의 가슴에 수를 놓았다. 불꽃놀이가 끝남을 아쉬워하는 사람들이 연이어 쏘아대는 작은 폭죽들에서 나온 연기들이 밤바다의 안개를 연출했다. 큰아들 녀석이 물고기들이 놀란다며 걱정을 해대는 통에 나도 '이제 그만좀 쏘아대라'고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어졌다. 자신들의 추억의 한자락을 장식하기 위해 쏘아댄 폭죽에, 다른 아름답고 평화롭던 세계의 파괴가 있음을 알기나 할른지... 아이들의 눈에도 인위적인 아름다움의 한계가 보인다는 것을 어른들이 제대로 파악이나 하는건지... 잠시 불꽃놀이에 정신을 빼앗겼던 자신을 추스리며 빗소리가 잦아드는 밤바다를 피해 민박집으로 돌아왔다.

  아침이 되자 비는 그쳤고, 조금은 간단해진 짐을 꾸려서 해변을 병풍처럼 감싸주던 금산(錦山)을 향하며 상주해수욕장에의 안녕을 고했다. 복곡지(池)를 지나 휴게소에 주차를 한뒤 이십여분을 걸어가야했는데, 간밤에 비가 온탓인지 보리암 가는길에는 산안개가 구름처럼 이리저리 몰려다니고 있었다. 금산은 신라시대에 승려 원효가 보광사라는 절을 지어 보광산으로 불렸다한다. 보리암 아래에 태조 이성계가 기도하던 곳이 있는데, 이성계가 이 산에서 백일기도 끝에 조선왕조를 개국하게 되자 그 보답으로 산 전체를 비단으로 덮으려 했다. 그러나 신하들의 주장에 의해 비단 錦자를 써서 금산이라는 이름으로 고쳤으며, 이후 금산으로 불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우리가 짧은 시간을 내어 다녀오고자 한곳은, 신라 신문왕 3년(683)에 창건된 한국 3대 관음 기도처의 하나인 보리암이다. 비록 산안개로 인해 푸르른 남해의 경치를 볼수는 없었지만, 기이한 암석으로 둘러진 금산의 정상에 자리잡은 아름다운 경내는 신도들이 줄지어 찾는 이유를 충분히 설명해 주었다. 좁은 대나무 숲길을 지나 태조가 기도하던 기도처에 가서, 산아래를 굽어 보며 땀방울 맺힌 머리를 아찔하게 식히고 온뒤 38경을 모두 둘러보지 못함을 아쉬워하며 충렬사를 향했다. 거북선에 올라 장령실, 군병휴식실, 선장실을 둘러보고 아이들에게 투구를 씌워주고 긴칼도 채워주었다. 케케한 오래된 나무 냄새와 낡은 전시물에 오래 머물고 싶은 생각이 들진 않았지만, 역사의 한 숨결이라도 느끼게 해주고 싶은 마음에 꼼꼼이 둘러보고 기념사진까지 찍었다. 뜨거운 한낮의 햇살을 그대로 맞으며, 지쳐있는 아이들을 이끌고 충렬사의 계단을 올랐다. 박대통령의 기념식수가 높게 솟아있는 것이 눈에 띄었고 그 아래 좁은 공간에 충무공의 묘가 있었다. 역사속에는 수많은 아이러니가 존재하는 듯하다. 추앙받고 존경받던 인물들도 공정한 훗날의 심판에 의해 시비가 가려지게 되고, 그들이 뿌려놓은 흔적들도 무참히 거두어지게 된다. 자신이 제왕으로 군림하던 시절에 흩어놓은 칼들이 순식간에 자신을 겨냥하는 비수가 되어 관속을 뚫게 되는 그 심판을 피해갈 자가 누구일꺼나... 보리암내의 바위에 새겨진 이름들도 비록 천년을 넘나드는 자료가 되기도 할테지만, 두고두고 후손의 입에 오르내리는 '개똥'이와도 같은 이름이되기도 하는 것이다. 누가 훗날을 기약할 수 있으리, 그저 겸손함이 미덕인 것을...

  이틀전에 건넜던 남해대교를 다시 지나 지리산쪽을 향해 코스를 잡았다. 하동을 거치면서 식당이 즐비했는데, 모두 적힌 메뉴가 재첩국이었다. 왼쪽으로 보이는 강줄기가 섬진강줄기였으며, 국내에서 가장 아름다운 구간임을 자랑하는 도로였다. 재첩을 잡는 사람들의 빨간 고무대야가 눈에 들어왔고, 동서의 화합을 축하하는 남도대교가 개통한다는 내용의 라디오방송이 계속 흘러 나오고 있었다. 이정표를 따라 최참판댁을 향하는 길로 우회전을 한뒤 넓고 푸른 논길을 지나며 평사리를 뒤덮은 최씨가의 비운과 재기를 가만히 떠올렸다. 비록 소설을 읽으며 머릿속에 그렸던 마을의 모습과 최참판댁과는 동떨어진 면이 있었지만 마을의 꼭대기에 자리잡은 한옥집 앞에서 내려다본 들판과 어우러진 섬진강줄기는, 상놈도 양반도 아닌 길상의 모습처럼 부처의 평온함 그대로였다. 강속에 담겨진 피맺힌 응어리도 유유히 흘러흘러 녹아지고 없었다. 남도대교가 이어졌듯이, 이젠 전라도와 경상도의 단절된 감정도 화개장터의 흥겨운 장바닥에서 막걸리 한사발로 어우러질 것이다. 늘 원하는 바는 이루어지게 마련이다.
  이젠 지리산을 관통할 차례였다. 천은사 매표소에서 입장권을 끊고 그렇게나 와보고 싶었던 지리산 자락을 굽이굽이 올라갔다. 역사의 은신처, 민중의 보호림! 골짜기· 계곡마다 켜이켜이 한이 서려있는 靈山! 내가 지금 그곳을 지나쳐 가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그저 스쳐 지나갈 뿐이었지만, 언젠가는 다시금 와서 그 모든 이야기를 다 들어줄 때가 있으리라. 눈물을 흘리며 그렇게 나또한 보잘 것 없는 이야기를 쏟아내리라. 노고단으로 가는 이정표, 뱀사골등의 낯익은 이름들이 다시금 결심을 굳히게 했다.
 
  지리산 IC를 들어서서 대전까지 오는길은 너무나도 빨랐다. 이젠 친근해진 빗줄기가 터널을 통과할때마다 오락가락하는 것이 신기하기도 했다. 집이라는 공간이 이렇게도 강한 흡인력으로 나를 구속하는 줄은 몰랐다. 어디에서건 돌아올 내집이 있다는 것이 행복하면서도, 어디든 훌훌 벗어버리고 떠날 수 있는 완벽한 자유를 구속하는 틀로 자리잡는 공간임에 목에 걸린 개줄마냥 갑갑하기도 하다. 하지만 이렇게 조용히 지난 며칠을 되새길 수 있는 휴식과 평안을 주는 공간임에는 틀림이 없다. 지나간 여행의 시간이 꿈인 듯 여겨지는 것도 집이라는 현실이 있기 때문인 것이다. 일상으로 돌아온 나는 또다시 동그라미를 그리며 살아갈테지. 내가 여행에서 찾은 것은 무엇이고 다시금 떠나서 찾을 것은 무엇일까? 여전히 가고 싶은 곳은 많고 다시 찾아서 샅샅이 살펴야할 곳도 많기만 하다. 아직은 빈 그릇이지만, 쌀이든 물이든 담아야할 그 무엇을 찾기위해 언제나 헤매야할 내인생이다. 그 무엇이든 넘치는건 원치 않는다. 그저 담으려 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