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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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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 웬수


BY 이쁜꽃향 2003-07-09

언젠가 노인을 위한 TV프로에서 '연상 퀴즈' 장면이 있었다.

진행자가 낱말 카드를 한 사람에게만 보여 주면

그 단어를 설명하여 상대 배우자가 알아맞춰야하는 게임이다.

 

시골 할아버지 한 분이 등장하셨다.

사회자는 '찰떡궁합'이란 낱말카드를 보여드렸다.

할아버지는 그 단어를 할머니께 설명 해야 하는 차례.

매우 진지한 표정으로 할아버지는 할머니를 향해,

'자네와 나는 뭔 사이여?'

더 기다릴 필요도 없는 정답이란 듯이 그 할머니는 큰 소리로

'웬 ,수'라고 외치셨다.

진행자는 모두 뒤집어 졌고 웃느라 말을 잇지 못하는데

그 할머니의 아주 당당하신 표정은 마치

'내 답이 정답이제?

내가 그까짓것도 못 맟출거 같애?'라고 하시는 듯하다.

 

답답해지신 할아버지는 화급히 할머니께 이심전심을 기대하며

'아~니, 웬수 말고 넉자로...'

안타깝게 할머닐 바라보신다.

알았다는 듯 더 큰 소리로 외치시는 할머니.

'백 ,년 ,웬 ,수'

 

그 순간

그 프로를 보며 저녁 밥상 앞에 있던 우리 가족은 모두

입 안의 밥알이 튀어 나올 정도로 한참동안 박장대소하고 말았다.

백발이 성성하시고

주름투성이이시던 그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얼굴엔

그동안 살아 오신 인생의 수레바퀴 자욱이 역력하시건만

할머니의 인생에서 남편인 그 할아버지는 평생을 '웬수' 같으셨을까...

일순간의 망서림도 없이 터져 나온 두 분의 사이를 말하는 단어,

'백년웬수'...

 그 프로가 끝나고 귀가하시어 서로 다투시진 않으셨을까.

우리 세대완 또 다른 생을 살아오셨을 그 할머니의 인생은

어쩌면 끊임없는 인내와 희생의 연속이셨을 지도 모른단 생각이 든다.

그렇게 사시는 동안 한스러움이 쌓여 있었으리라.

 

언젠가 TV드라마 '여인천하'를 보던 둘째 녀석이 물었다.

'엄마,

저 시대엔 여자가 남편에게 큰 소리로 대들지도 못 했대요?'

'으응...

그 땐 말야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고 여자가 나서는 것도 안 좋아 했고,

질투하거나 남편에게 대들거나 따지면

칠거지악이라 해서 소박 맞기도 했지...'

건성으로 대답하는 내게 아들넘은 일침을 놓았다.

'와아~

엄만  그 시대에 안 태어나신 게 정말 천만다행이다...'

'왜에?~'

'하마트면 곤장 맞고 당장 쫓겨났을 거 아냐~

엄마 목소리가 얼마나 큰데?

말 싸움 하면 아빠가 지잖아~

엄마가 얼마나 싸나운데...'

 

어이가 없어 웃고 말았다.

그래서 질세라 한 마디 덧붙였다.

'바보야~

엄만 그 시대에 태어났으면 아마 여왕 신분이었겠지~ 안 그러니?'

'에이~

후궁이었겠다, 뭐 ... 그치이?'

끝내 한 방 얻어 맞고야 말았다.

 

요즘은  남편들의 권위가 말이 아니라고들 한다.

물론 조선시대와 비교한다면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모 사이트에 가 보면

아직도 집에서 '권위'만 내세우는 가장들도 많은 거 같다.

우리집도 예외는 아니다.

'남자가 여자랑 똑 같냐?'를 단골 메뉴로 사용하는 남편이었으니까.

 

내 성깔도 보통이 아니라고 모두들 말을 하는데

아이들이 자라면서는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많이 참고 사는 편이다.

아이들이 놀랄까 봐

충격 받을까 봐...

 

참아야만 하는 까닭이 또 있었다.

언젠가 둘째 녀석이 심각하게 하던 말,

'엄마, 난 지금 사춘기야.

한참 예민한 때인데

엄마 아빠가 부부싸움 하시면 내 마음이 얼마나 불안 하겠어?

싸우더라도

아무리 아빠가 미워도 절대 이혼은 하지 마!

애들이 아빠 없는 애라고 얼마나 놀리는지 알아?

그러면 아마 난  비행 청소년 될지도 몰라...'

아예 반 협박이다.

그래서 아이 앞에선 더더욱 참아야만 한다.

 

누가 정말 좋아서 참고 봐주겠는가.

다 자식들 때문에 참고 사는게지...

그런 줄도 모르고 때론 기고만장하는 바보탱이...

어느 후배 말마따나,

돈을 아주 잘 벌든지,

성격이 좋던지,

자상하던지,

잘 생겼던지...

존경 받는 남편의 조건이라나 뭐라나...

 

우리집 '백년원수'는 과연 그 가운데 몇 점이나 받을 수 있을까나...

 

돈은 잘 못 벌면서 쓰기는 남보다 더 잘 쓰고,

성격은 속된 표현으로 '개떡'같이 불 같고,

하기야 자상하기는 하지...

생긴 것도 그냥 혐오감은 안 줄 정도로 봐 줄만 하게 생겼고...

그러면 칠팔십 점은 되려나...

나이가 양반이라더니

요즘은 그 성격도 많이 좋아져서 내가 따지고 대들 일도 별로 없더구만...

그나마 없으면 정말 불편할 지 모르니

잘 달래가면서 함께 살아가야 할 밖에...

 

먼 후일

정말  '백년웬수' 가 아닌

'찰떡궁합' 소릴 할 수 있게 잘 살아야 할텐데...

그러면

남편 점수도 구십점대 쯤으로 올려 줄 수가 있을걸...

남편이 이런 내 생각을 충분히 느끼고 있어야 할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