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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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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손수건을 묶는 사람들


BY 마음자리 2003-07-07

지난 늦가을 강원도로 가족여행을 떠났습니다. 첫 목적지는 정동진이었지만 상원사를 들리고 싶은 욕심에, 대관령을 넘지 않고 진부로 빠져서 상원사를 들렀다가 진고개를 넘었습니다.

단풍은 거의 다져서 산은 회색으로 바뀌는 중이었는데, 유독 노란색 단풍을 매단 나무들은 뒤늦은 우리들의 가족여행을 축하라도 해주기 위해 기다렸다는 듯, 가지에 매달린 채 화장을 지우지 않고 애써 버티고 있었습니다.

노란 단풍나무들을 보면서 저는 까마득히 먼 23년 전의 세월로 거슬러 올랐습니다.

23년 전 제가 재수를 하고 있던 어느 날, 수업시간 중에 누군가에게서 건네 받은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노란 손수건>, 겉장마저 노란 그 책. 그날 수업은 하나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고, 그 책이 주는 감동에 몸을 떨 정도의 전율을 느꼈습니다.

실제 일어났던 각각의 감동적인 일들을 모아서 엮은 책. 문교부 장관을 지내신 분이 모두의 귀감이 되라고 그 이야기들을 모아서 정성스레 펴낸 책.

그 이야기들 중의 하나 '노란 손수건'. 이미 책으로 노래로 많이 알려진 그 이야기의 내용은 부연하지 않겠습니다. 살아오면서 그 이야기를 듣고 감동 받은 많은 분들을 만났습니다. 그때마다 제가 느낀 곤혹스러움이 있었습니다.

"온 나무 가득한 노란 손수건을 누가 묶었을까...?"

대부분 제가 만나 이야기를 나눈 분들은, 그 죄수의 아내가 형기를 마치고 그 길을 지나는 남편이 혹시라도 못 보고 지나칠까봐, 그 나무가 온통 뒤덮이도록 노란 손수건을 가득 묶었으리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놀랍고 감동스러운 아내의 사랑인가...하시면서...

근데 전 그렇게 생각지를 않았거든요.

그 이야기를 읽고 나서, 제 머리 속에는 오래도록 이런 그림이 그려졌습니다.

그 죄수 남편의 이야기를 듣고, 그 버스에 같이 탄 승객들이 모두 같은 마음으로 노란 손수건이 그 나무에 묶여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과 마찬가지로, 그 마을에도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하는...

기다린다는 표시로 노란 손수건을 묶어두라는 남편의 편지를 받고, 그 부인은 얼른 가게에서 노란 손수건을 한 개 사서는, 기쁜 마음으로 눈에 잘 띄는 나뭇가지에 풀어지지 않게 꼭꼭 묶었습니다.

그 나무가 동네 어귀에 있는 걸 보면 아주 큰 나무가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 다음 날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그 부인은 노란 손수건이 잘 묶여 있나 다시 한번 확인을 했습니다. 미소를 지으며 집으로 돌아온 부인은 저녁을 하다가 약간의 걱정이 생겼습니다.

'혹시 잎에 가려 손수건이 잘 보이지 않으면 어쩌지...? 그냥 지나치면 큰일 나는데...'
걱정은 조바심이 되고, 그 부인은 얼른 노란 손수건을 하나 더 구해서는, 잎이 덜 무성해서 버스를 타고 지나치면서도 잘 보일 것 같은 가지를 골라 또 묶었습니다.

며칠째 계속 동네 어귀 큰 나무에 노란 손수건을 묶는 그 부인을 이상하다고 느낀 사람들은 역시 마음 맑은 동네 아이들이었습니다.

"아줌마 뭐하세요? 왜 나무에 노란 손수건을 묶어요?"
어떻게 설명해줄까 망설이던 부인이 이렇게 설명을 해줍니다.

"응~ 아줌마 남편이 예전에 죄를 지었단다. 그래서 벌을 받았지. 이제 그 벌을 다 받고 며칠이 지나면 집으로 돌아오는데, 아줌마가 용서해줄지 어떨지 걱정되었나봐. 버스를 타고 마을 앞길로 지나가는데, 이 나무에 노란 손수건이 묶여있으면 용서해주는 줄로 알고 버스에서 내릴 거고, 안 묶여 있으면 그냥 버스 탄 채로 지나가겠다는구나..."
"그럼 아줌마는 용서하신 거네요?"
"응...아줌마는 벌써 용서했단다. 죄에 대한 벌은 이미 받았지 않니? 그리고 아줌마는 사실 남편이 많이 보고 싶단다."
곰곰이 생각해보던 아이들 중 하나가 말합니다.
"아줌마. 제 생각에는요...저기 저 나뭇가지에 묶으면 더 잘 보일 것 같아요."

그 동네 아이들은 서로 보고 웃으며 말없는 약속을 했습니다. 집으로 돌아간 아이들이 노란 손수건을 하나씩 들고 나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습니다.

"아줌마~ 우리도 도울게요."
그 부인은 눈가를 적시며 아이들이 전해주는 고마운 사랑을 가슴 가득 받았습니다.

저녁 식사시간이 되자 집으로 간 아이들은 무료한 식사시간 중에 조심해서 낮에 있었던 이야기를 꺼집어냅니다.

"아빠~ 죄를 짓는 건 나쁜 거죠?"
"그럼~"
"그럼 죄지은 사람이 그 죄에 대한 벌을 받고 난 후에도 계속 나쁜 사람인가요?"
"아니지. 응분의 벌을 받았다면, 또 그 죄를 스스로 뉘우친다면, 우리와 똑같은 평범한 사람이란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도 하고 죄도 지을 수 있는 거란다..."

아이들이 노란 손수건에 얽힌 이야기를 그 가족들에게 전한 그 다음날 아침, 오늘도 그 나무에 매달 노란 손수건을 챙겨들고 그 곳으로 향하던 부인은 의아한 광경을 목격하게 됩니다.

목수 일을 하는 동네 아저씨 한 분이 밤새 그 나무 아래에 사람들이 오르내리기 쉬운 사다리를 막 완성하고 땀을 훔치는 게 보이고, 그 사다리 뒤로 손에 손에 노란 손수건 하나씩을 든 마을 사람들이 서로에게 환하게 웃으며 길게 줄을 서있는 걸 보게 된 거죠.
작은 가게를 하는 아저씨가 달려와 부인에게 말합니다.

"부인.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어요? 부인이 하나 둘씩 노란 손수건을 사가더니, 어제 밤부터 오늘 아침까지 노란 손수건을 얼마나 팔았는지...가계에 있던 노란 손수건이 다 동이 났어요. 혹시 마을에 무슨 일이 있나요?"

물끄러미 나무를 바라보던 부인은 그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은 채 양팔에 얼굴을 묻고 흐느껴 웁니다. 아이들이 먼저 달려와 아줌마를 감쌉니다. 마을 사람들도 하나둘씩 다가와 말없는 웃음으로 부인의 주위를 둘러쌉니다.

"자~~ 빨리 묶고 다들 일들 나가십시다~"

온 나무 가득 노란 손수건으로 채워지는 그런 그림이 제 마음속에 그려졌습니다.
모르죠? 이웃 마을 사람들까지도 소리소문 없이 매달고 갔을지...

개인과 개인의 화해와 용서가 아니라...버스에 탄 사람들과 마을 사람들이 서로 어우러지는 용서와 화해, 격려와 사랑. 서럽던 제 재수 생활이 그 책을 읽고 나니, 더 이상 서럽지가 않았습니다. 가슴속에는 제가 한 일은 아니었지만 뭔가 뿌듯한 큰사랑이 담겨지는 것 같았습니다. 사랑이 있다면 어떤 시련도 두렵지 않음을 배웠습니다.

눈을 돌리고 혹시 내가 묶을 노란 손수건이 없나 찾아보세요.
누군가 그 노란 손수건 덕분에 새로운 삶을 시작할 지도 모릅니다.
아니 어쩌면 내가 새로운 세상을 만나게 될 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