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하다는 말을 쉽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문 것 같다.
사람들이 말하는 행복의 가치들이 저마다 다르기 때문에 자신의 현재 상황이 충분히 행복할 수 있는 조건이면서도 행복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많다.
결혼이라는 굴레에서 다람쥐 쳇바퀴 돌듯 미래에 대한 아무런 준비도 없이 힘들어하고 좌절하는 사람들이 너무많다.
누구나 인생을 살아간 횟수가 늘어갈 수록 자신의 인생을 뒤돌아 보면 소설책 수십권을 쓰고도 남을 많은 얘기들을 털어놓고 쓰고 싶을 것이다.
답답할때면 머리속의 수많은 말들이 떠오를때면 글을 쓰고 싶다.
하지만 두서없이 마구잡이로 쏟아져나오는 얘기들에 치여 감당하지 못할때도 있다.
채팅이란 걸 해봤다.
가정파괴의 주범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많고 마약처럼 중독되는 것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나에게는 얼마안가서 그것 마져도 싫증이 났고 나 혼자만의 공간속에서 혼자말을 하고 싶어했다.
서른한해를 살아오면서 많은 일들을 겪었다. 인생의 좌절도 많이 겪었다.
그다지 유복하지 못한 가정에서 무능한 아버지와 생활력 강한 어머니는 늘 다툼이 잦았다.
더구나 세상에 치여 제 역량을 발휘하지 못하고 심신이 지쳐버린 오빠에 대한 애증과 안타까움에 더욱 복받쳐 올랐다.
대책없이 돈문제로 늘 사고를 치시는 아버지가 이해되지는 않았지만 나에게 아버지는 항상 말이 없고 자상한 분이셨다.
어머니는 30이 가까워서 아버지를 만나 여지껏 고생만 하셨다. 지금까지 직장생활을 하신다.
생활능력이 강하셔서 남편에게나 자식들에게나 항상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으신 분이다. 아버지가 저지른 수많은 대형사고들을 투쟁하듯 이겨내오셨고 수습해 오셨다.
결혼하기 전에 터진 엄청난 빚으로 우리집은 폭풍이 몰아쳤다.
어머니는 앞뒤가 맞지 않는 아버지의 말을 그때도 여지없이 믿을 수 밖에 없었고 그 많은 빚을 어머니가 그동안 피땀흘려 모은돈으로 갚아주기를 수십번 하셨다.
그땐 아버지가 미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버지에게 대들고 엄마하고 헤어지라는 말도 서슴치않고 했건만 왜그리도 아버지가 안쓰럽고 안되었던지 그땐 이해할 수 없었다.
결혼하고 아이도 낳고 현실이 너무 힘들고 부모가 된다는것이 얼마나 힘든지 알게되자 결혼전 철없던 내 모습들이 하나둘 떠오르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무능력한 분이셨고 더구나 대책없이 사고를 치시는 분이셨다.
그러나 결국 그런 아버지를 만든건 겉으로만 강한 어머니탓이란걸 알게 되었다.
부모님의 사는 모습을 보면서 남편을 어떻게 리드해야 결혼생활이 잘 유지 될 수 있다는 걸 서서히 알게 되었다.
아버지는 은연중에 어머니를 든든한 후원자로 생각했고 모든걸 어머니에게 의존하게 되었던 것이다.
또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에게 매몰차지 못했고 어머니 자신이 아니면 아버지는 벌써 인생을 망쳤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생각이 오히려 더욱더 역효과를 나타냈고 이제는 서류상으로 이혼한 상태이며 동거인으로 살고 있는 아버지를 보면서 괜스레 아버지에게 좀더 냉정하지 못했던 어머니가 원망스러웠다.
내가 좀더 철이 일찍 들었더라면 나라도 어머니에게 자식된 도리로 충고를 해드릴 수 있었을텐데 그때 내모습 역시 나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서 가족을 멀리하고 그 가정에서 도피할 생각에만 골몰하고 있었다.
그런 딸의 모습을 보면서 어머니는 스스로 더욱 강해 져야 한다고 생각했고 철없는 딸이 가는 길을 그냥 보고 있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어머니에게는 심신이 건강하지 못한 아들이 있다.
바로 세상과 융합하지 못하고 바보가 되어버린 우리 오빠가 있다.
내가 결혼을 일찍 하게 된 이유중에도 오빠가 있었다.
학창시절부터 유난히 외모를 따지고 잘난척하던 오빠 여동생이라고 하나 있는 건 그리 이쁘지도 않았고 공부도 잘 못하는 멍청한 아이로 보였을 것이다.
오빠는 자신의 친구들한테 조차도 여동생 보이기를 꺼려했었고 부끄러워하던 오빠였다.
그로인해 오빠와는 점점 거리가 멀어졌고 결혼할 무렵에는 오빠를 증오하기를 서슴치 않았던 나였다.
학창시절 오빠는 꽤 머리 좋고 공부도 잘하고 동생인 나보다는 훨씬 잘나고 똑똑하다고 생각했다.
오빠와 엄마는 성격이 비슷했다. 불같은 성격이라 싸움이 잦았고 어떨땐 내가 결사적으로 싸움을 말려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너무나 맞지 않는 성격 때문에 항상 서로의 탓만 했었다.
전문대학을 졸업하고난 후 오빠는 점점 이상하게 변해갔다.
어렵사리 들어간 좋은 취직자리도 적성이 맞지 않아서 연수기간에 결국 쫓겨나듯 나와버렸고 점점 사회에 적응을 해나가지 못했다.
오빠는 스스로 신이 되기를 서슴치 않았다. 힘든 수행을 하고도 도를 구하지 못해 미쳐버리는 스님들도 많은데 정신세계에 심취되어서 신이 되기를 차처했었고 자신은 보통사람과 다르다는 말을 서슴치 않고 내뱉었다.
소심한 성격 고쳐보겠다고 성격개조학원 다니면서 길거리에서 웅변이란 것도 해보고 마인드컨트롤도 하고 단전호흡에 빠져 결국은 상기병이란 심각한 병에 걸려 공부도 할 수 없게 되었다.
단전호흡을 잘못하면 몸속의 기가 머리쪽을 향해서 머리가 아픈 병이 상기병이었다.
오빠의 운명은 점점 꼬여가고 있었다.
그 이후로도 오빠의 방에는 온통 도에 관한 얘기 철학에 관한 얘기 사주에관한 얘기 정신세계에 관한 책들로 가득차게 되었다.
내가 결혼을 한 이후에 오빠는 서울에 있는 정신세계와 관련된 단체로 많은 돈을 들여 가게되었다.
그곳에 간지 일년만에 아버지와 엄마는 한밤중에 새벽기차를 타고 오빠를 데리러 가게 되었고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하지만 오빠의 병은 점점 더 심각해져만 갔다.
보통 사람들이 말하는 정신병자가 아닌 오빠는 신병을 앓게 된 것이다.
그것도 올바른 제대로된 고급령들이 아닌 저급령들이 달라붙어 오빠의 심신을 황폐화시켜버리고 말았다.
그 이후로 엄마와 오빠는 아버지만 집에 홀로 남겨두고 소위 말하는 퇴마능력을 지닌 스님이 계시는 사찰에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자신과의 처절한 싸움을 하게 되었다.
1년이 안되어서 다시 집에 오게 되었지만 오빠는 완전하게 자신을 찾지 못했다.
정신과 약을 먹지 않으면 밤마다 다시 환청에 시달리고 신경이 예민해져 있었다.
오빠도 자신의 의지로 이겨낼려고 약을 먹지 않으려 했지만 너무 힘들어 했었다.
정신과 약을 먹으면 기운도 없고 의욕도 없어지기 때문이다.
엄마는 별의 별 방법을 다 써보고 오빠를 고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스승을 찾아 봤지만 그런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고 설사 있다고 한들 믿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지금은 많이 나아진 편이라서 아버지를 따라 일용직 근로자 생활을 하고 있지만 심신이 너무 힘든 상태라서 무척 힘들어 했고 자주 몸이 아프다며 일을 잘 못하고 있다.
이제는 결혼할 나이가 다되어 여자 생각이 나서 힘들텐데 그런 상태로 결혼은 엄두도 못낼 상황이다.
예전에 오빠는 컴퓨터도 즐기고 팝송도 잘부르고 책을 읽으면 내용과 주인공의 이름도 아주 기억을 잘하고 했었다.
꽤 똑똑한 오빠라고 생각했었는데 오빠의 인생이 이렇게 풀릴거라곤 생각하지않았다.
그로인해 엄마는 아버지의 뒤치닥거리도 모자라 오빠로 인한 마음고생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다.
엄마의 경제적인 능력으로 봐서는 지금쯤이면 아파트 두채를 사고도 남을 재산을 모았을 상황인데 달랑 남은건 그나마 빚때문에 서류상 아버지랑 이혼을 한 상태로 지금 살고있는 집한칸 뿐이다.
이젠 며느리를 봐야할 나이이건만 엄마는 이미 그런 행복한 꿈을 접은 지 오래다.
이제 내 얘기를 해볼까 한다.
결혼한지 6년째이다.
불행한 가정이 싫어서 그 곳에서 탈출하고 싶어서 결혼을 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를 너무도 무시하는 오빠도 싫었고 너무 단속이 심한 엄마의 그늘에서도 벗어나고 싶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로 나의 삶도 순탄하지 않았다.
공부머리가 별로 없었던 탓에 고등학교를 떨어지게 되었고 야간고등학교 삼년을 다니면서 내 생활도 나태해져 갔다.
그래도 그곳에서는 공부를 잘하는 편이었지만 야간고등학교를 다니는 딸이 자랑스러울리 없던 엄마와 나를 무시하던 오빠로 인해 성격또한 의기소침해져 소극적인 아이가 될 수 밖에 없었다.
나름대로 모범생이었지만 사회에 진출하면서 사이비 종교인 대순진리란 곳에도 기웃거려 보았고 그러다 종교에 대한 환멸이 느껴져 찾게 된것이 엄마가 믿는 불교였다.
부처님의 불제자가 된것이다.
한때는 스님이 되었으면 하는 가당치도 않은 생각도 해보았다.
구도자의 길이 얼마나 힘든지 얼마나 많은 고통이 따르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나역시 사회생활에 적응을 잘 못하여 그만둔 직장만해도 1~2년 사이에 여러군데였다.
그러다 방송대학교 국문과에 입학하게 되었고 불교서클에 가입하여 인생의 전환기를 맞게 되었다.
금강공원내의 금정사라는 사찰에서 법회를 보다가 인연이 되어 종무소에서 사무를 보게 되었다.
그곳에서 4년정도 근무를 하면서 지금의 남편을 만나게 되었고 많은 사람들을 접하게 되었다.
도반들과 어울려 수많은 추억을 만들어 나갔었다.
캠프도 가고 철야정진기도도 하고 사찰순례도 하고 스님들께 좋은 법문을 들으며 인생공부도 하고 인간세상의 덧없음과 번뇌를 알게 되었다.
수많은 인연들의 인과법칙도 알게 되었고 내 친정부모님과 오빠의 모습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 차츰 이해가 되기 시작했으며 엄마에게 악연의 고리를 풀어야 하는 이유도 나름대로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결혼 6년간 시부모님과 많이 힘들었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면서도 너무나 힘든 현실에 부딪힐 때면 이겨내기가 힘들었었다.
이해할 수 없는 시부모님들의 언행과 집착때문에 맘 고생이 심했었지만 미워하지 말자며 일부러 다짐했었다.
미워하면 다시 만나서 풀어야 할 실타래가 더욱 꼬여버린다는 걸 알기에 노력하자고 지금도 다짐하고 있다.
남편과도 많은 다툼이 있었지만 그 역시도 깊은 불제자의 인연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나름대로 잘 따르는 사람이었고 서로를 이해하고자 노력하는 중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가족의 소중함을 더욱 느끼게 되었고 지금은 같이 맞벌이를 하면서 열심히 살고 있는 중이었는데 요즘들어 또 다시 혼란을 주는 일이 생겼다.
경제적으로 힘이들어서 배운것이 여자아이 한복치마를 만드는 일이었다.
공업용미싱으로 대량생산을 하는 것인데 기술을 배우는 과정또한 많은 일들이 있었다.
한복기술을 가르쳐준 언니는 나보다 14살이 위이다. 여호와증인을 믿는 독실한 신자였다.
불제자인 나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려고 애를 쓰고 성경을 권하고 거기서 나오는 잡지들을 권했다.
별로 관심이 없어 읽어 보기를 소홀히 했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을 흔들게 하는 수많은 대화와 토론이 오고 갔다.
하느님만이 유일신이고 이 세상을 지배하는 통치자는 따로 있으며 세상의 종말은 다가오고 있으며 새로운 낙원을 기다리고 있다며 나와 함께 절망적인 이 세상에 희망을 버리고 낙원을 향해 가자고 늘상 말하고 있다.
지금 현재 이세상은 너무 무섭고 위험한 상태이다. 그들을 지배하는 통치자는 하느님이 6,000년간만 기회를 준 나쁜 신들이란다.
그래서 자신의 임기가 다 되어 가니까 최후의 발악을 하는 결과가 지금의 현실 모습에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나도 잘 이해할 수 없는 고차원의 불경보다 현실의 모습을 실감나게 적어놓은 성경의 말이 맞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하기도 했다. 지금의 세상은 너무나 절망적이고 희망이 없어 보이니까 그렇게 생각했다.
그들은 이 세상을 구원하려고 하느님이 보낸 심부름꾼이라고 그랬다.
하느님의 낙원으로 가자고 종말이 왔을때 후회하면 이미 때는 늦은 거라며
여호와증인에 대한 인식이 별로 좋지 않았었지만 그들은 이방인처럼 생활하면서도 나름대로 열심히 검소하게 생활하고 있었고 그들에게 가졌던 편견들도 많이 사라졌었다.
하지만 나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옳다고 생각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서양에서도 서서히 인정이 되고 먹혀들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아직은 무엇이 진리인지 분간할 만한 눈이 부족하지만 이 세상의 종말이 온다고 해도 그것이 두려워서 현실을 외면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불교를 믿는 나도 내 가족의 안일을 위해서 기도한 경우는 별로 없었다.
신비주의 불교가 아니라 현실적인 불교를 생각했었다.
진정 부처님이 인간에게 깨우쳐 주려고 했던 진리가 무엇인지 더 궁금했기 때문에 부처님의 가르침에 더 귀 기울이고 싶었다.
하지만 요즘 사람들의 행복의 기준은 점점 타락하고 있다.
돈을 신처럼 떠받들게 되고 성의 노예가 되어 가정을 파괴하고 인간스스로를 파괴하고 있다.
여자는 남자를 무시하고 남자는 여자를 무시하고 있다.
서로를 믿지 못하고 얼마나 많은 부를 가졌냐에 따라 무시하거나 존경받는 세상이 오고 말았다.
행복한 길은 분명 있겠지만 그길을 찾지못해 고통받고 힘들어 벗어나려고만 한다.
그로인해 자신들의 분신인 아이들은 버림을 받고 그 아이들은 가슴에 커다란 상처를 안고 똑같은 어른으로 자라나고 있다.
결혼한지 6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나는 행복한 사람이란걸 알게 되었다.
늘 불행하다고 생각했건만 그건 다 내 착각과 잘못에서 비롯된 것이란걸 알게 되었다.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지는 건 쉬운일이 아니다.
자꾸만 쇠뇌를 시키면서 되뇌이다 보면 행복해진다는 사실을 예전엔 믿지 않았다.
나보다 못한 나보다 불행한 사람들의 사연을 접하면서 내 자신을 반성하고 있다.
내 남편의 자상함과 착실함을 진실됨을 새삼 느끼고 있다.
그렇게 불만스러웠던 남편이 어느순간 너무나도 자랑스러운 남편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친정엄마에게도 늘 불만을 터뜨렸던 내가 시부모를 머리로라도 이해하게 되었고 남편의 고마움을 엄마에게 얘기하게 되었다.
딸 걱정하지 말라고 말하게 되었다.
아직 고칠점이 너무나 많은 딸이고 아내이고 엄마이고 며느리지만 불완전한 인간이기에 큰 변화를 원하지는 않지만 아이들에게 떳떳한 부모가 되기위해서 부단한 노력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점점 확고하게 든다.
내 미래가 어떻게 전개될지 궁금하고 걱정이 되기도 한다.
인간이 가진 욕망도 하나도 빠짐없이 다 가지고 있지만 얼마나 인내를 잘하고 조절해 나가느냐에 달린것 같다.
남편과 나의 분신인 아이들이 과연 얼마나 올바르게 커 나갈 수 있을지도 걱정이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남편과 나는 부처님이 설하신 세상의 평범하지만 실천이 잘 안되는 친리들에 귀를 기울여 실천하고자 노력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