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럭키치약>
이 치약이 문제의 발단이었다.
내가 여섯 살 정도였을 때, 그 때는 대부분 소금으로 양치를 많이 하던 시절이라 그랬는지, 치약을 사면 선전용 사은품이 있었다.
어느 날, 치약을 팔러 온 외판원이 치약을 사면 영화 초대권을 한 장씩 준다고 온 동네를 광고하며 다녔다. 물론 일류 극장은 아니었지만, 그 당시 대 히트를 치던 대구의 윤복이라는 어느 불쌍한 소년의 일기를 영화화한 "저 하늘에도 슬픔이" 초대권이었다.
영화를 좋아하시던 우리 어머니, 아버지와 큰형을 제외한 우리 식구 수대로 치약을 사셨다. 날짜를 맞추어 식구 수대로 보러 간 흑백영화. 무대가 대구라 그런지 훨씬 친근감이 갔고, 내용은 엄마 없이 주정꾼 아버지와 사는 아이들의 생존을 위한 처절한 몸부림. 양아치도하고 동냥도하고...그러면서도 열심히 서로 위하면서 살고..이를 지켜보는 선생님. 주연배우는 그 선생님 역을 맡은 신영균씨.
영화관을 나서면서 우리 식구들 모두는 각자의 슬픔에 겨워 울먹였던 기억이 난다. 어릴 적 본 영화였지만 밴허와 마찬가지로 몇 가지 장면들이 강하게 기억에 남았다. 여기까지는 아무 문제도 없었다.
내 국민학교 5학년 2학기가 시작된 지 며칠 안된 날, 학교 가는 길에 그 운명의 영화 포스터 "속, 저 하늘에도 슬픔이" 를 보았다.
어릴 적 그 인상 깊던 장면들이 머리 속을 마구 스쳐지나가고.. 나는 바로 연구에 돌입했다. 어떻게 볼까?
방과 후 문방구에 표준전과를 사러갔다. 근데 이게 웬 횡재!!!
문방구 앞에는 커다란 대나무 바구니 안에 중고 전과가 가득 담겨 있었다. 보는 순간, 내 머리가 빨리 돌아가기 시작했다. 가격은 새 전과의 반액. 내용을 보니 다른 것도 없다.
''''그래 이걸 사자. 남는 돈으로 영화를 보고. 그 남는 돈을 잘 갈무리하면 또 한편 더 볼 수도 있을 거야.''''
''''냄새를 잘 맡는 형이 눈치채면 어쩌지?''''
''''뒷장 속지에 붙은 연도표시를 떼자. 그럼 작은형도 모를 거야.''''
쾌재를 부르면서 가방을 집에 집어던지고 완전 범죄를 꿈꾸면서 영화관으로 달려갔다.
영화는 날 실망시키지 않았다.
고등학생이 된 그 윤복이형은 여전히 학교 잘 다니고 있었고, 집을 나갔던 엄마도 만나고, 동생들도 열심히 잘 산다는 내용. 세월이 흘러 흑백에서 칼라 영화로 바뀌었지만 예전의 감동이 그대로 살아났다.
나의 죄를 까맣게 잊고 영화가 준 여운을 곱씹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집에 들어서면서 부터 길지도 않은 꼬리가 밟혔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어머니가 날 보자마자 다그치기 시작하셨던 것이다. 이실직고하라고...
역시 문제는 작은형이었다. 어릴 적 엄마를 막내인 나에게 뺏기고 나서부터, 나의 비리를 캐는 재미로 세상을 소일하며 살던 머리 좋은 케쉬타포 같은 형. 결국, 또 그 촉수에 걸리고 말았다. 형은 어머니 앞에서 조목조목 헌 전과인 이유를 잘도 설명했다. 논리 정연하게...
난 고집을 부리는 외의 다른 대안을 찾지 못했다.
"이건 새 전과야~~"
"호야 익이 데리고 그 전과를 샀다는 문방구에 갔다온나."
어머니의 엄명이 내렸지만 난 한 가닥 구제의 가능성에 기대어 그때까지도 계속 우겼다. 근데 그날은 예전에 잘 져주시던 그 어머니가 아니셨다. 목소리도 차갑고, 따뜻하던 눈매는 온데간데 없는 서슬 퍼른 어머니셨다.
형과 같이 그 문방구로 향한 길을 걸었다.
"하느님...도와주세요. 시간 좀 멈추게 해주시면 안될까요?"
잔꾀 부리는 기도이니 하느님이 들어주실 리 만무하고, 문방구 아저씨는 너무도 쉽게 내 죄를 명명백백하게 확인해 주셨다.
돌아오는 길 작은형은 말이 없고, 나는 마지막 남은 한가지 방법을 시도했다.
"히야. 니 내가 밉제...난 히야 니 좋아하는데 히야는 와 이래 낼 괴롭히노..."
"히야 니도 잘못 안 하고 살 수 있겠나? 그럴 때 나도 히야 편들어 주께. 이번에는 모른 척 좀 해도고."
"히야. 엄마가 이 사실을 알마 얼매나 기가 막히고 마음 아푸겠노...히야 니 엄마가 속상하마 존나?"
"내가 정말 잘못했다. 히야도 알제? ''''저 하늘에도 슬픔이''''. 그 영화 속편 한다해서 나도 모르게 나쁜 짓 했다. 영화만 보고 다른 데는 돈 안 썼다."
"히야. 엄마한테 새 전과라 해도고. 응~. 엄마는 히야 말은 믿어줄 거다."
동정심에 호소한 내 노력에도 불구하고, 교과서 같은 형의 입에서 나온 말.
"익아. 엄마한테는 사실대로 말 할란다. 대신 니 영화보고 싶어서 그랬고, 전과 내용은 별다른 거 없다고 해주께."
집으로 돌아오는 길, 입안의 침은 다 말라버리고, ''''아...우짜지.... 도망가 버릴까...?'''' 이 생각만 맴돌았다.
집에 오니, 어머니는 저녁을 준비하고 계셨다.
작은형이 어머니에게 사실대로 말하고, 스스로 너무 부끄러워진 나는,
''''그래 처분대로 하지 뭐...나도 모르겠다. 다신 그런 짓 안 한다. 정말 다시는 내 양심을 속이는 그런 짓은 말아야겠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익이도 그만 씻고 밥 먹어라." 어머니 말씀.
''''어!!! 이럴 수가? 저녁을 먹이고 날 혼내실 작정이시구나.''''
둥그런 두레상에는 누나와 형들이 미리 앉았고, 이미 그 이야기를 모두 다 알고 있던 그들은 아무도 나에게 말 걸지 않았다.
라디오 연속극을 듣고 잠들 때까지 나에 대한 체벌은 미루어졌다. 늘 자던 어머니 옆 내 자리를 형에게 양보하며 난 눈치껏 구석에 가서 누웠다.
"익아. 이리 온나." 엄마 목소리. 눈치보며 슬금슬금 엄마 옆자리로 이동.
날 꼭 안으시며 내 귀에 조용한 어머니의 목소리.
"익아 오늘 마음 고생했제...다신 그런 짓 하지 마래이...다음에 또 그런 짓 하면 엄마가 니 쫓가낸다."
그 말을 끝으로 그 날은 마감되었고, 그 날 이후 지금까지 그렇게 양심을 속여 침이 다 마를 지경까지는 한번도 안 가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