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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에서 마주친 가장 아름다운 미소


BY allbaro 2001-09-19

내 인생에서 마주친 가장 아름다운 미소

응급실에 다녀 왔습니다. 붉은 줄이 그려진 유리문을 급하게
들어선 순간부터는, 모든 것들이 파리하게 빛을 잃어 갑니
다. 주욱 늘어선 천정의 형광등들이 그렇고, 하나같이 절박
하게 찡그린 표정들인 응급환자들의 지리한 밤이 애처롭습니
다. 원색을 가졌었던 모든 응급실의 구성 존재들은 제 색감
을 잃고, 늘 보아온 환자들의 격심한 고통이 오래된 벽지의
곰팡이 자죽저럼 스며들은 듯 합니다. 벽과 침상과, 의사와
간호사들의 제복이, 이미 오래전 병동이 생길 때부터 굳어버
린 듯한 Pale Green 공간이, 소독약 내음 가득한 대기중에,
엷은 신음의 커어튼으로 가려져 있습니다. 환자들은 생생한
고통에 들떠있고, 의사와 간호사 그리고 보호자들은 낙심과
졸음에 겨워있습니다. 동일한 공간에서 서로를 방치하고, 무
관하게 두 개의 세계가 되어 작은창의 다른편에서 벽화가 되
어 머물러 있습니다. 환자들은 만화의 말풍선처럼 자그마한
링거를 꽂고 호흡합니다. 안도와 근심과 검사결과를 기다리
는 초초한 시간이, 늘어져 버린 링거병 안에 하나씩 떠오르
는 기포와, 반투명의 관을 통하여 똑똑 흘러내리는 링거액을
따라 느릿하게 걸음을 옮깁니다. 링거에 담긴 그저 조금의
포도당으로 생명을 연장할 수 있을 것처럼 편안함을 가집니
다. 아마도 심리적인 효과는 수술만큼이나 클 것 같습니다.
옆자리 환자의 고통이 인내의 둑을 넘어 신음으로 흐르고,
심란한 마음에 밖으로 나가 멈추어 선 어두운 현관앞에서는,
어떤이의 보호자 인듯한 여인이 하염없는 눈물을 소리죽여
흘립니다. 어둠에도 차갑게 반짝이는 굵은 눈물이 보입니다.
나는 담배를 하나 꺼내어 물었고, 중년의 여인은 곁의 기둥
에 기대어 울고 있습니다. 엷은 구름에 가린 여린 달빛이 비
추이는 희미한 그림자의 병원 바깥 공간마저도, 응급실의 공
기를 자꾸만 닮아내고 있습니다.

어디지? 병원이요. 음? 갑자기... 급성 신우염이래요. 나 많
이 아파요. 간신히 통화를 마친 뒤, 아슬아슬하게 말을 잇고
있었던 당신의 열에 들뜬 음성이 귀에 남았습니다. 문을 열
고 들어선 병동에는, 이미 응급실을 나온 당신이 다른 3명의
환자들과 함께 입원실의 남루한 철제 병상에 누워 있었습니
다. 당신의 어머님은 자리를 피해 주셨고, 당신은 희미하게
웃었습니다. 어쩐지 물에 비추인 달 그림자를 보는 듯한 그
런 미소였습니다. 상기되어 붉은 얼굴은 심하게 열이 오르고
있었고, 이마엔 땀방울이 배어 나오고 있었습니다. 40도 가
까이 열이 오르내렸고, 나는 일그러진 표정과 일그러진 형태
로 15도쯤 앞으로 기울어 당신의 병상앞에 서 있었습니다.
당신의 희미하게 안개가 낀듯한 눈동자를 바라보며, 나는 무
력했고 무엇이든 해야 하겠는데, 내가 할 수 있는일은 철저
하게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당신의 뜨거운 오른손을 쥐
고, 링거액이 한방울씩 창백한 당신의 팔, Turquoise Blue의
혈관을 타고 흘러 들어 가는 것을 보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당신은 깊은 잠이 들었고 나는 돌아 왔습니다. 몇 가지 짐을
간단하게 꾸리고, 출근을 위한 옷가지를 챙겼습니다. 내가
당신의 곁에 있도록 할게. 다들 돌아가시라고 하지. 병원의
밤은 엷었고 탈색된 어둠이 환자들의 신음에 얹혀 끈적하게
깔려 병실과 복도로 은밀하게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작은 간
호인 의자에서 어찌어찌 가라앉는 선잠이 들었고, 새벽 무렵
당신의 신음에 잠이 깨었습니다.

보름치의 병원 주차권을 끊고 저녁이면 병원으로 퇴근하고
새벽이면 당신을 깨워 세면실, 화장실로 링거병을 들고 미끄
러 지듯이 천천히 걸었던 기억입니다. 일주일 째부터 당신은
아주 작은 것이긴 하였지만 웃음을 되찾았습니다. 새털같이
가벼운 당신의 몸을 깊숙히 안아 옮겨 주었던 느낌이, 당신
에게서 나던 병원의 내음과 함께 아직 코 끝에 머물고 있습
니다. 웬일인지 그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우리가 무슨 이야
기를 나누었었나 별루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당신을 안고
좁은 병상위에서 함께 잠이 들었고, 내가 먼저 잠이 깨는 이
유는 혹시 의사가 실수로 내 엉덩이에 주사를 놓을까봐 걱정
이 되어서! 라고 했던말이 생각납니다. 천천히 입술의 끝을
당기며 내게 건네준 당신의 미소가 얼마나 눈부시게 아름다
웠는지 모릅니다. 당신에게 생기가 돌아왔을 때, 나의 마음
에도 역시 생기가 돌아왔습니다. 아마도 그 미소가 내 인생
에서 마주친 가장 아름다운 미소였을 것입니다. 인적이 드문
새벽의 세면실에서 갑자기 당신은 나를 환자답지 않은 힘으
로 안았습니다. 고마워요. 당신 정말 고마워요. 나 빨리 나
을께요. 맛있는 것 만들어 주고 싶어요. 당신의 입술에서는
희미한 치약의 향이 났었고, 나는 당신의 입원 후, 처음으로
마음을 조금 편안한 곳에 내려 놓을 수 있었습니다. 오늘 당
신의 퇴원이래 몇 년만에 처음으로 응급실에 오게 되었습니
다. 웬일인지 담배는 입술에서 타지 않고, 손가락 끝에서 길
다란 재를 남기고 말았습니다. 채 입술로 옮기기전에 툭! 하
고 부러져 주차장의 바닥을 잠시구르다 바람에 실려 사라집
니다. 흐릿한 달빛이고 창백하게 질린 파리한 별빛입니다.
엷은 구름이 가린 검은 하늘아래, 나는 제법 오래된 기억들
을 주섬거리고 있었습니다. 흐느끼던 여인도 어디론가 가버
리고, 검은 어둠속에 오도카니 웅크리고 있는 근심많은 주차
장의 자동차들 사이로, 머리속이 텅 비어 버린채 잠시 천천
히 걸었습니다.

숙취처럼 묵직한 새벽에서야 돌아온 숲속의 아침은 가리운
안개속에서 깨어 났습니다. 가을은 다람쥐에게 제법 여문 은
행을 안겨 주었습니다. 추석 선물세트 같은 그런 두툼한 은
행입니다. 지나가는 나의 인기척에 어지간히도 놀래었으련
만, 절대로 은행을 놓지 않고 머리를 갸웃거리면서 고민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겨울과 지독한 추위와 내년봄의 약속에
관한 적지않은 사연의 가을입니다. 무슨일을 하였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 몽롱한 하루를 보내었고, 귀뚜라미가 우는 소
리가 낡은 LP레코드에 난, 긁힌 상처위를 플레이어의 바늘이
넘나드는 듯한 감촉으로 다가옵니다. 별이 가득한 까만 밤하
늘 아래에서, 나는 몇 잔의 부드러운 술을 마시었네요. 이내
별 빛이 일렁이고 나는 흔들렸습니다. 부끄럽게도 당신은 아
직도 너무나 그리운 사람이었습니다.


세 그루 소나무 아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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