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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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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통보


BY 이쁜꽃향 2003-06-26

모두들 살기가 너무나 힘들다고 아우성이다.

경기가 풀리질 않아 음식점이나 장사하는 집들은 매일 울상이고

여기저기서 돈 떼었다고 걱정들인 데 나와는 별 상관없는 이야기라서

강 건너 불구경하듯 했다.

나야  국가에서 주는 월급으로 사는지라 수입이 거의 고정적이니

경제의 변동을 쉽게 피부로 느끼질 못하는데

어쩌다 올봄에 가게를  시작하고 보니 결산을 하는 남편의 얘길 가끔 듣노라면

정말 심각한 지경인 모양이다.

여지껏 남의 집 이야기인줄로만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당장 내 발등에 떨어진 불이었다.

꼭 집어 수입만이 문제가 아니다.

곰곰 생각해보니 가게를 오픈한 이후 두세달 동안

우리 가족은 한 자리에서 식사를 해 본 기억이 거의 없다.

나야 출퇴근 시간이 일정하지만 남편은 늘 나보다 늦게 나가고 늦게 들어 온다.

갑자기 생활 리듬이 바뀌고 남편이 어찌나 공사가 다망한 지 서로 얼굴 볼 새가 없다

새벽녁에야 귀가한 남편을 차마 깨울 수가 없어

아들녀석 0교시 수업 시각에 맞춰 태워다주는 것도 내 차지가 되어버렸다.

내 아침 식사야 대학 졸업 후 출근하면서부터는 해 본 적이 거의 없으니 그렇다치더라도

곤히 잠든 남편의 모습을 뒤로한 채 출근을 해야 하고

초저녁 잠이 많은 나는 늘 남편의 귀가를 기다리질 못하고 잠들고 만다.

언젠가부터 우리는 졸지에 상대방의 깨어 있는 모습을 볼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주말부부도 아닌데 우린 겨우 주말에나  한 공간에 있을 수 있게 되어버렸고

그렇게 살다보니 우리 가족은 쌀 5kg으로 한달여를 먹고도 남았으니

도대체 집에서 뭘 먹고 살았는지 가히 짐작이 갈 것이다

가장이 집에서 식사를 안하니 식솔들 반찬이야 오죽하겠는가.

걸핏하면 인스턴트나  주문식으로 끼니를 떼우기 마련이다.

어른들이야 밖에서 무엇으로든 요기를 하겠지만

아들녀석이 문제였다.

녀석은  늘 내가 끼니를 챙겨주기만을 기다린다.

때로는 달려 가 급히 챙겨주지만, 바쁘거나 피곤할 때엔

"뭐 시켜 먹을래...?"가 입에 달렸다.

얼마나 자주 시켰으면 자장면집 아저씨가,

"하나는 원래 배달이 안 되는데 네가 시키면 해 줄께.

그런데 반드시 주문할 적에 ''''단골인데요''''를 붙이거라." 했겠는가...

자장면, 돈까스,치킨, 피자...

아들이 즐겨 먹는 주문 메뉴다.

남편 사무실과 우리집은 걸어서 오분도 안되는 거리이니

아들녀석 좀 챙겨주면 오죽 좋으련만

어찌 된 셈인지 여지껏 아들녀석들 담당도 내 차지가 되어 버렸다.

남편은 ''''장애인 복지 문제''''에만 앞장 서 일 하느라 매일 분주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가족 복지 문제''''엔 전혀 관심조차 갖지 않고 있다는 데에

점점 불만이 쌓이기 시작했다.

나는 화가 나면 아예 침묵으로 일관하는 습성이 있다.

그러다 보니 한 달 가까이 남편과 대화를 안 한 거 같다.

정말 이렇게 사는 건 사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그냥 지켜보고만 있을 순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게 비장한 마음으로 최후의 통보를 했다.

더 이상 이렇게는 살지 않겠다고.

불우 이웃 복지에만 신경 쏟지 말고 가장으로서 가족을  돌보고

가정경제에 좀 신경을 쓰라고.

난 지금 폭발 직전이지니 건드리지 말라고.

내가 죽어라고 일해봤자 남는 것도 없는 짓 이젠 고만 하고 싶다고...

이멜을 보내고는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내가 너무 심하게 한 것이 아닌가 싶어서...

''''잘 알았네...''''

남편의 짧은 답글엔 자신의 온갖 심정이 다 담겨 있는 듯했다.

그 후로도 십여일이 지나도  역시 달라진 건 별로 없어

어젠 다시 마지막으로 문자를 한 번 더 보냈다.

''''더 이상 이렇게 참고만 산다는 게 정말 우습다. 깨끗이 정리하자''''라고.

남편은 하루종일 아무런 답이 없더니 내가 잠들기 직전에 들어왔다.

자기 사무실에서 아들녀석 공부하는 걸 내내 지켜보다가 함께.

이야기 좀 하잔다. 자기에게 뭐가 불만이냐고...

그동안 대화할 시간이 궁핍했던지라 못했던 불만을 볼 멘 소리로 토로했다.

서로의 마음 속 불만이 교환되었다.

난 화를 풀지 않고 계속 쏘아댔다.

어느 정도 할 말이 끝나자 남편은 슬그머니 화해를 청한다.

''''''''내가 화해를 받아줄께 화해 하자...''''''''

''''''''뭐~야?

누가 화해를 청하기라도 했어?''''''''

''''''''아들넘 제대해서 오는데 우리가 어색하게 살고 있음 맘이 편하겠어?''''''''

''''''''하이고~

난 아들넘 오니깐 댁같은 남편은 안중에도 없~네.''''''''

''''''''내가 정말 깨끗이 정리해버릴려고 했는데 아들넘들 때문에 참는다~''''''''

 

늘 느끼는 것이지만 부부간에도 정말 대화가 필요하다는 것과

아무리 ''''''''부부 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 하지만

그렇다고 속으로만 끙끙 참아서도 안된다는 것.

마음 속에 앙금이 쌓이지 않도록 그 때 그 때 풀고 살아야만 한다는 걸

다시금 깨닫는다.

 

오늘 우리 큰 아들녀석이 드디어 이십육개월의 군복무를 마치고 제대한다.

어쩌면 그 녀석으로 인해

우리 부부는 몇일 더 앞당겨서 대화의 물꼬를 트게 됐는지도 모르겠다.

불만을 모두 털어버리고 나니 오늘은 한결 머리가 개운하다.

''''''''다시 찾은 세상의 빛''''''''이라고 말년 휴가 때 아들녀석이 폰 배경화면에 써 넣은 글이

지금의 내 심정일지도 모르겠다.

오늘은 저녁 반찬거리로 무엇을 준비해야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