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탁을 새로 사 왔다. 식탁없이 한 동안 밥상을 차리자니 너무 불편한게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그래서 식탁을 새로 들여놓았다. 짙은 밤색의 이인용 식탁이다. 화려한 멋은 없으나 단단해 보였다. 유리를 깔지 못해서 흠이 생길까봐 걱정스러웠으나 며칠 그냥 견디기로 하였다.
그랬는데 어제는 퇴근해서 집에 와 보니 식탁에 칼금이 가 하얗게 속이 드러나 있는게 아닌가. 이게 왠 일이란 말인가. 기가 막혀 소리를 지르며 아이들을 불러냈다. 큰 아이말에 의하면 작은 놈이 수박을 꺼내 식탁위에 놓고 그냥 냉큼 썰었다는 게 아닌가. 작은 놈은 올해 육학년이다. 얼마나 기가 막히는지. 내 입에서는 순식간에 봇물처럼 아이에 대한 질책이 쏟아져 나왔다. 한편 물건을 함부로 사용하는 아이의 생활태도가 너무 화가났고 그런 아이를 누나란 녀석이 아무 신경쓰지 않고 바라보고 있었다고 하니 도저히 용서할 수 없을것 같았다. 아이는 기가 죽어 내 눈치를 슬슬 보며 어찌할 줄을 모르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 열을 내다 바쁜 저녁준비를 하느라 잠시 잠잠해졌다.
지난 번 오래된 낡은 식탁에서는 아이가 무슨 짓을 하던지 상관하지 않았던것이다. 처음에 그 식탁을 처음 사왔을때 나는 얼마나 즐거워 하였던가. 반질반질 윤나게 정성을 다해 닦았었다. 그 식탁은 결혼해서 처음 갖는 식탁이었으니 지금것 보다 더 유별나게 반겼던것 같다.그런데 지금 그 식탁은 네 다리를 몽땅 잘라서 쓰레기더미속으로 들어가 버린게다. 그 식탁에는 그 동안 내가 살아 온 십년이라는 세월이 고스란히 들어있었다. 아이들이 태어나지 않았을 때 그 식탁에는 그와 나 달랑 둘이었다. 그리고 아이가 태어났고 그 아이가 식탁의자를 잡고 기어오르던 일, 식탁에 엉성하게 앉아 밥을 먹던 일이며 그리고 작은 아이가 태어나고 우리들의 일상은 늘 그 식탁에서 시작했고 그 식탁에서 마쳤던것 같다. 남편의 삶 한켠을 어쩌면 그 낡은 식탁의 네다리가 받치고 있었던 건 아닐까.
이제는 우리의 삶이 고스란히 담긴 그 식탁도 그리고 남편의 성실했던 젊은 날의 모습도 찾아볼 수 없다.
우리 네식구의 결코 짧지 않았던 세월이 그대로 스며든 그 낡은 식탁의 행방은 이제 찾을 수 없다. 우리는 또 다시 새로 산 식탁에 무수히 많은 생금들이 그어지는 것을 지켜보아야 한다. 그때마다 나는 악악 소리 지르며 아이들을 때로는 남편을 다구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받아들여야 하는 내 삶의 분명한 모습이라는 것을 나는 알아갈 것이다.
살아간다는 일은 이렇게 새로 산 물건에 칼금을 내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어쩌면 정의 다른 한 방향은 아니었는지. 남편의 헝클어져버린 나이 마흔의 모습이 내가 받아들여야 할 정의 또다른 방향은 아닐까.
아이와 남편과 그리고 무수히 많은 일상들이 이 새로 산 식탁에 다시 흠을 내기를 나는 기대해 본다. 그 흠들은 내 가슴에 잡힌 잔주름같은 칠순 친정 어머니의 곱던 얼굴에 그어진 잔주름같은 정의 상징은 아닐런지.
칼금난 속살을 까만 싸인펜으로 칠을 했다. 그럴듯 하다. 눈에 금방 띄지 않으니 그런데로 견딜 만하다.
나의 식탁이 다시 삶의 지평선 너머로 사라질때까지 그때까지 또 나는 최선을 다하여 식탁을 차려야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