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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밖으로(2)- 모스크바, 영하 38도


BY 성주 2003-06-05

세상 밖으로(2)- 모스크바 공항, 영하 38도


새벽 다섯시 아직 잠에 취해 있던 아이들을 흔들어 깨워 옷을 입혔다. 아이들은 여행가는 기분에 들떠 순순하게 일어나 옷을 챙겨입고는 입을 다물 줄을 몰랐다. 중학교에 들어가는 큰 애와 4학년이 되는 쌍둥이 녀석들, 세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긴 여행길이 시작되는 것이다. 새벽 6시 30분, 울산 공항에 도착한 우리는 남편과 짧은 이별을 하고 긴 설레임과 마주하였다. 여행사 직원과 만나기로 한 시간은 11시 30분, 인천 공항에 도착한 시간은 9시 15분, 그때부터 우리의 긴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예쁜 20대 후반의 TC(travel conduct)가 우리 네 식구의 서류를 넘겨주며 주의사항과 비행기 출발시간을 알려주었다. 작은 돈으로 많은 곳을 여행하려니 우리의 일정은 빠듯할 듯했다. 모스크바 공항을 경유해서 베를린 도착, 비행기에서 보내는 시간이 총 열다섯시간. 공항에서 비행기를 기다리는 시간까지 합치면 모두 24시간을 경과해야만 우리의 여행이 시작되는 베를린에 도착하는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운항을 한다는 러시아 항공, 하지만 노후된 기체와 경직된 서비스를 제공하는 스튜어드와 스튜어디스, 익숙하지 않은 러시아 말, 좁은 좌석이 첫 해외여행에 대한 두려움을 배가시키기만 하였다. 외국인이 지나가면 뒤를 돌아보면서까지 나와는 다른 외모를 신기하게 쳐다보던 그 촌스러운 습관이 남아있는데 이제 내가 누군가의 호기심 어린 시선을 받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늘 밑으로 파란 하늘이 끝 없이 이어졌다. 이미 한국시간으로는 저녁 9시가 지나가고 있었지만 비행기 바깥의 풍경은 여전히 낮이었다. 며칠째 러시아를 엄습한 한파로 모스크바 시내의 모든 수도관이 파열되고 동사한 사람이 급증하고 있다고 하던데 '쩡, 쩡'하고 울릴 듯한 차가운 기운은 오히려 내게 신산스러웠던 내 몇 년간의 행적들을 얼어붙게 하는 것만 같았다. 가슴으로 차가운 기운이 스며들었다. 어스름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모스크바 공항에 도착한 시간은 우리 시각으로 새벽 1시, 하지만 모스크바 시간으로는 초저녁인 6시였다. 공항의 좁은 통로를 지나치려는데 우리와 함께 도착했는지 내 옆으로 수 많은 인도인들이 지나가고 이국에 있다는 실감을 할 무렵 모스크바 공항 건물이 한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둥근 관들을 붙여 만든 듯한 조형물이 공항 천장에 무겁게 붙어있는 모스크바 국제 공항의 첫 인상은 어두움이었다. 경제적으로 어려워서 그런지, 아니면 어두운 것을 좋아하는지 공항의 전등은 어두운 실내에 우울하게 켜져있었고 사람들의 표정도 무표정했다. 공항내에서 근무하는 공익요원들은 군인들처럼 일사분란했고 우리에게 지시하는 말들도 군대식 구령 같았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러시아 사람들은 문화적 우월감이 대단해서 자국에 입국하는 외국인들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모든 사무적인 일들이 굉장히 까다로우며 비행기를 경유해서 가는 경우, 재수 없이 발이 묶여 하룻밤 러시아에서 보내게 되면 온갖 서러움을 당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비자가 없이는 러시아 땅을 밟을 수가 없기 때문에 갑작스런 러시아 체류 때에는 보안요원이 호텔까지 ?아와서는 숙박객이 묵은 층의 엘리베이터를 잠그고 모든 통로를 차단시켜 다른 곳으로의 이동은커녕 일체의 개인행동은 상상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모스크바 공항에서 서너시간이상을 보내야 한다고 했을 때 그때 모스크바 구경을 잠시만 하라고 했던 지인의 이야기는 그야말로 코메디같은 상상이었을 뿐이다. 아름다운 여름궁전이 있는 곳, 어느곳보다도 아름다운 유산을 지닌 곳, 높은 콧대와 지난한 삶이 함께 있는 곳, 무너진 공산주의의 상징, 모스크바, 영하 38도의 차가운 그들 경제만큼 그들 마음도 얼어붙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