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태여난 곳은 적산가옥풍의 일본식 철도사택이였다.
같은 가옥구조로 두채씩 얼마큼의 거리를 두고 약 10여채가 있어
철도종사자의 주거용 집이었다.
다다미방에다 복도가 있어 복도 끝에는 화장실이 있었고 슬리퍼를 신고 드나 들었다.
마루아래는 커다란 지하실이 있었는데 계단을 많이 밟고 내려 가야하는 침침한 곳이었다.
텃밭에서 농사지은 곡물이나 간단한 농기구와 허접한 살림살이를 두는 공간이 었는데
드나듦이 불편해서인지 지하실 출입은 전혀 안하고
우리들이 술래잡기할때 간혹 숨어 들기도 하고
소꿉놀이할때 저안엔 도대체 뭐가 있나하고 목욕탕발판처럼 생긴 뚜껑을
호기심반 두려움반 어린 눈으로 들춰 보았던 기억이 난다.
같은 구조로 지은 판박이로 찍어낸듯 같은 가옥이였는데도
우리집은 유난히 귀기가 서린 집이였다.
우리가 이사오기 훨씬전인 일제강점기때 그집에 조역의 딸인가 살었는데
상사병이 들었는지 실연을해서였는지 시나브로 병이 들어 죽었단다.
전깃불이 귀하던 시절 밤이되면 사위가 적막강산으로 변하곤 했는데
우리집 화장실 창문에서 퍼런빛이 나는걸 봤다는 사람도 있었고
우리집 화장실에서 귀신이 나온다는 소리를 동네 또래친구 엄마에게 종종 들었다.
관사집에 살면서 엄마 돌아가시고,
새엄마의 입성을 반대하는 외할머니와 오빠들에게 등 떠밀리다시피
아버진 집을 나가 새살림 차리시고,
큰오빠 군입대하고
졸지에 식구가 줄어버린 우리는 많은 살림살이를 건사할 여력도 없었고
두집살림살이가 필요치않은 우리식구는(외할머니 큰오빠 나)
아랫녘에서 흘러들어온 떠돌이 젊은 양주에게
집과 꽤 많던 밭까지 부쳐 먹으라고 맡기고 정거장집으로 나왔더니
고양이에게 생선가게를 맡긴셈으로
집 봐준다는 그사이 우리집 재산 가로채 졸지에 흑사리 껍데기 같은 처지가 되었다.
가재도구까지 놔두고 잠시 봐달라고 맡겨놓고 나온 집을 졸지에 빼앗기고는
가끔이라도 오고 가는길에 먼발치라도 볼라치면 눈물이 핑그르 돌았다.
거기 박쥐무늬 경첩을 한 여닫이 옷궤가 있었고
장독대에 장항아리들이 서로 뽐을 내듯 옹기종기 놓여 있었고
집앞 밭한가운데 포도나무 한그루 뎅그라니 있어
사방에 말뚝으로 포도덩굴이 뻗어 나갈 수 있도록 의지를 마련해 줬다.
복도가 보이는 마루문을 열면 나무로 만든 이중평행봉이 있어
다다미방에서 공부하다 지친 오빠들이 철봉에 올라타 돌면서
케세라세라와 위스크다라를 불렀다.
뜻모르고 오빠들 따라 케세라세라를 부르던 시절...
귀하디 귀한 알미늄 소꿉장과 백설공주 동화책을 자랑하던
그 행복이 그리 오래가진 않았다.
엄마가 돌아가시기 며칠전날 밤 심하게 비바람이 불더니만
뒷동안에 소나무가 벼락을 맞고 쓰러졌다는 소리를
내가 열댓살이나 되었을 무렵 엄마와 친하셨다는 동네 아주머니께 들었다.
울안엔 채송화와 활련 봉숭화 백일홍그리고 꽈리나무
가을엔 코스모스와 과꽃이 언제나 그자리에 피어있었다.
흔하게 볼 수 있는 꽃이였지만 작은오빠의 세세한 관심을 받는 꽃들은
남의집 담안에 꽃보다 정갈하고 예쁘게 피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커다란 세퍼트메리가 꼬리치면 반갑다고 반기던 그 집...
식구처럼 따르던 메리가 없어져
어디갔냐고 할머니께 물으니 선로반 사람들이 가지고 갔다고해서 섭섭해서 울던 일...
초등학교 일학년때까지 살던 내가 태여난 적산가옥 관사집...
안좋은 일이 많이 생겨 사람들이 흉가라고했지만
그래도 내겐 유년의 소중한 기억들이 담뿍 서린 그 집...
일전에 생각나가보니 현대아파트 들어서려는지 한창 재개발 공사중...
이왕지사 움도 싹도 없이 밀었으면
우리가족의 슬픈역사도 깡그리 가져 가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