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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혜린 추억하기


BY deermam 2001-09-04

흔히들 예술가들이 프랑스 몽마르트 언덕에 보내는 향수와 같이 독일 뮌헨의 슈바빙 거리는 나의 노스텔자의 근원지 같은 곳 이였는데 이는 순전히 전혜린 때문이였다.

중학교 졸업선물로 전헤린의 수필집"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를 받은 것이 인연의 시작이였다. 그리고 "목마른 계절""이 모든 괴로움을 또다시""전혜린 평전"등을 수액을 흡수하듯이 읽어갔다.

가을에 목말라 교정에 은행나무들이 질식해 떨어질때면, 잠자고 있던 내 발아기의 감성들은 물만난 물고기처럼 지느러미를 펄럭거리면서 날아다?품? 그녀의 광기어린 지적 호기심과 , 서울대 법대 재학 시절의 모습들은 그녀를 충분히 신격화 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항상 검은 머플러를 두르고 검은 외투를 입고 세수는 안해도 매뉴큐어와 눈가에 검정색 마스카라를 빼먹지 않았다는 그녀, 까만때가 끼어있는 손가락으로 마로니에 광장의 술집에서 맥주를 마시고 맛있게 담배를 피웠었다는 그녀.
목숨 마냥 사랑햇던 남편과 어린 딸의 추억, 그리고 뮌헨 대학과 슈바빙 거리.

슈바빙은 이미 나에겐 지도에만 나오있는 피안의 땅이 아니다. 기독교 신자에게 이스라엘이 성지이듯, 이슬람인이라면 생전에 꼭 한번은 가봐야 하는 메카였다.
성경이듯, 이슬람 경전이듯 난 그녀의 수필집들은 내 사유의 성전이 되었다.
난 그녀의 행적을 따라하듯, 검정색 옷들을 입기 시작했고, 그녀 자신이 자신의 평범함을 저주했듯이 그녀의 천재성을 따라가지 못하는 나의 평범함을 저주했다.
그리곤 그녀의 일기 어느 부분에서처럼 "이런 평범함이 날 미치게 한다"라고 썼었다.

독일식 맥주와 훈제된 하얀 소세지, 지독한 향수병에 시달릴 때 향수를 달래주던 영국 공원, 가스로 오렌지색 불빛을 내는 가로등, 지독한 안개, 독일 안개.

마르탱 뒤가르의 "회색노트", "티보가의 사람들" 잉게보르그 바흐만의 "삼십세"
이미륵의 "압록강은 흐른다"등-그녀가 읽은 책들을 찾아 읽었고, 마로니에의 손바닥 보다 큰 노란 잎들을 보기 위해 버스를 타곤 했다. 그때만 해도 마로니에 광장엔 몇 안되는 연극 공연장과 홍사단 건물이 전부였다.
미성년자인 나는 맥주 한잔은 커녕 커피 한잔도 마실수 없었지만
메마른 단팟빵을 씹으며 내가 태어나기도 전 이 땅에서 고독했던 한 여인의 광기를 씹고 싶어했다.

광기란 언어가 주는 매니아적인 집착증, 동물적인 집착증을 사랑했지만 불행히도 나는 천성적으로 그렇게 진득한 인간은 아니였다.
왜냐구? 다행인지 불행인지 난 천재가 아닌 것이다.

나의 철없는 관념적 세계에 대한 치기 어린 놀음은 대학에 들어와 현실에 눈을 뜨면서 가볍게 아주 가볍게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지금 나에게 어딘든지 떠날 수 있는 비행기표가 주워진다면 독일을 택할 것이다.
지금은 9월이고, 전혜린이 마셨던 맥주와 쏘세지를 맛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가슴 한편에 아릿하게 남아있는 순수의 시절에 대한 송가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