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 첫날을 맞은 아이들은 사실 늦잠을 좀 자고 싶어했지만
집안에 어른이 계시면 그렇게 늦게까지 늦잠을 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요.
"아야(어머님께서 저를 부르실 때 쓰는 호칭), 너 운동간다며..."
어머님께서 저희방문을 똑똑 두드리며 말씀하셨어요.
"예..."
졸리운 눈을 비비고 시계를 쳐다보니 이미 8시더라구여.
후다닥 일어났지만 몸은 자꾸 이불 속으로 다시 들어가려고만 하고,
머리속은 아직도 꿈속을 헤매는 것만 같았어요.
'방학인데....'
아쉬움은 한가득 남지만 사실 아침잠을 더 자면 무슨 소용이겠어요?
큰애가 청소기 돌리는 걸 도와주고, 작은애는 자기 침대를 정리하고, 어머님은 토욜이라 목욕을 가시고, 부지런히 집안일을 끝내니 참 수월하고 좋았어요.
아이들이 들고다닌 가방을 빠니 시커먼 땟국물이 줄줄 흘러나왔지요.
다 빼놓은 줄 알았더니 그 안에서 싸인펜 한 세트가 물에 적은 채 발견되었고, 누구에게서 받은 선물인지 포장지로 예쁘게 싸인 연필도 있더라구요.
(사실 큰애는 어제 여자친구들로부터 크리스마스 카드와 선물 몇가지도 받아왔었거든요.)
작은애는 친구가 발이 갑자기 커지는 바람에 그 친구가 준 실내화도 낡디낡아졌고, 큰녀석은 실내화를 신고 얼마나 뛰어다녔는지 바닥의 줄무늬도 없어지고, 가운데 부분은 갈라져서 속이 보일지경이었지요.
문득 이모님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났어요.
'애들 신발 작을 때가 그래도 좋은 때야...'
신발이 커나가면 그만큼 아이들이 성장했다는 소리이고, 그렇게 되면 또 자꾸 부모곁을 떠나고 싶어하잖아요.
남자애들이 좀 크고 나면 그저 제방에만 쳐박혀 있고 고작 한다는 말이
"밥줘요, 돈줘요.."
뿐이라지요?
그렇게 될까봐 전 미리미리 아이들과 다짐을 해 두었어요.
"니들 쫌 컸다구 엄마 무시하고, 문 닫고 방에 들어가 말두 안하고 그러면 안 돼.... 지금처럼 잼있는 이야기도 하고, 학교에서 있었던 일도 얘기해주고 그래야 돼. 엄마랑 같이 영화도 보고, 좋아하는 가수 노래도 같이 듣고 그러자... 꼭이야!!"
지금은
"물론이지... 엄마, 나만 믿어. 난 그런 사람들 이해가 안 가!"
이렇게 대답해 주지만 크고나면 또 달라질까요?
저희 어머님은 큰애의 익살스런 재담을 참 좋아하시는데,
할머니 흉내를 내며 사투리 섞인 말투로
"워매... 방구냄사..방구냄사..."
하면
"에구구..저녀석이 할머니 흉내내면서. 망할놈. 호호호호..."
하시며 너무너무 웃으신답니다.
밥을 먹는 모습을 보고도 흐믓해 하시고, 김치를 쭉쭉 찢어서 밥위에 돌돌 말아 올려 한입씩 쓱쓱 먹어치우는 모습을 보시며
"저 놈 먹는 모습 좀 봐라. 요즘 누가 저렇게 김치를 잘 먹는다냐.."
엉덩이를 툭툭 두드려 주시죠.
샤워를 한다고 옷을 벗은 채로 몇마디 말이라도 하고 서있으면
다 큰 놈이 부끄러운 줄 모르고 벗고 섰다고 하시면서도 은근히 토실토실 살진 아이의 몸을 감상(?)하시며 즐거워 하시죠.
아이들은 이렇게 할머니가 저희를 진짜 예뻐하고 좋아해주셨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고,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있으니 아마 오래오래 기억할 거예요.
이담에 그렇게 추억하겠지요.
할머니께서 내 얼굴만 쳐다봐도 기뻐하셨고, 내가 하는 아무 얘기에나 같이 즐거워 해 주셨고, 함께 속상해 주셨고, 엄마의 잔소리와 꾸지람으로부터 유일한 보호막이었음을.
사실은 아이들이 더 크지 않고 이대로였음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도 한 적이 있어요.
엄마,아빠밖에 모르고, 선생님 어려워 할 줄 알고, 친구와의 우정을 소중히 생각하고, 할머니 사랑을 듬뿍 받으며 세상물정에 조금은 어두워 모든 세상을 장미빛으로 바라볼 수 있는 지금이 젤 행복할거 같거든요.
운동을 나가며
"너희들 방학동안에 꼭 하고픈 일, 그리고 해야할 일을 적어놔. 실현가능한 것으로 말야. 엄마가 운동다녀와서 읽어보고 같이 계획을 세우자...알았지?"
"엄마, 형이랑 같이 짜요?"
"아니. 따로따로 계획을 세워..."
했었지요.
오후에 각자 책상에 놓인 메모지를 보니
스키장가기, 친척형과 밤늦게까지 놀기, 스케이트장 가기, 컴퓨터 프로그램짜는 거 배우기.... 등등이 적혀있었지요.
노는 것만 써놓지 않아서 얼마나 고맙게 생각했는지요.
아이들에게 좋은 알찬 방학이 되게 미리미리 좋은 계획을 세워야겠어요. 이사가거나 전학가서 그리웠던 친구도 한번 만나게 해 주고, 좋은 곳으로 여행도 다녀오고, 친척집도 찾아보고, 자기힘으로 무언가를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도 심어주고 싶고....
작년 12월 31일엔 기아체험을 하면서 24시간을 물만으로 버틴 적이 있었는데, 배고픔이 얼마나 큰 시련인 줄 절실하게 깨달았었던 경험을 같이 한 적이 있었어요.
제야의 종소리와 함께 피자를 시켜먹으며
"엄마, 배고픈 사람들 정말 불쌍해..."
하고 눈물마저 글썽였었지요.
그때 같이 아들과 굶어주느랴 저두 힘들었지만 정말 보람된(?) 하루였지요.
저희들끼리 지지배배거리다가 또 티격태격하다가 깔깔깔 웃다가 하루종일 귓가가 쟁쟁할 정도로 시끄러웠지만 그런 소리가 집안에 울려퍼진다는 것도 아름다운 축복이라고 생각해요.
그만큼 건강하고 활기차게 살고있다는 증거니깐요.
어머님은 일찍 주무신다고 자리에 누우셨고, 아직도 근무중이라 퇴근을 못하고 있는 아빠를 빼고 저희들끼리는 잼있는 영화라도 보겠다고 이제 텔레비젼앞으로 몰려앉았어요.
여러분들도 좋은 시간 되세요.
크리스마스이브의 이브날.
가족과 함께 사랑이 꽃피는 아름다운 시간들이 되시길 바라며.
모두들 평안히 주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