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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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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당 가는 길에 살던 내친구 정애


BY 리 본 2003-04-21

 
초등학교 일학년때 내짝이던 정애는 참으로 조신했다. 
요즘 통신용어로 말한다면 조신모드이다. 
조신한 정애 땜에 난 할머니께 숱하게도 혼이나야 했다. 
"갑인(정애아버지 성함)네 간나는 조신하고 천상여자인데 
네년은 왜 그리 옷도 잘 찢어먹고 선머슴처럼 덜렁대냐"고 하시면서 
겨울상의 주머니입구를 아예 실로 친친 꼬매 버리셨다.
(딱지, 구슬, 공기 많이 넣고 다녀 찢어뜨린다고..) 
언니가 많은 틈바구니에서 자란 정애는 참으로 여성스러웠다. 
우리 저학년때는 토기 두마리가 방아를 찧고 있는 생철로 만든 필통을 갖고 다녔는데 
가방에 넣고 다니면 왈그락 달그락 소리도 요란할 뿐 아니라 
연필들이 서로 부딪혀서 골기가 일수였다. 
깎으면 깍을수록 연필심은 맥없이 툭툭 부러졌다. 
정애는 비닐사탕 껍질을모아 잘게 썰어서 필통밑에다 깔고 연필이 흔들리지 않도록했다. 
연필도 길고 가지런히 모양을 내어 깎아 정리정돈을 잘하긴 했지만 
공부는 좀 떨어져서 시험때는 내가 종종 가르켜 주었다.(ㅡㅡ;;) 
정애네 아버지와 우리 어머니가 같은 갑인생이었고 
할머니와 같은 성(한양조씨)이기 때문에 집안네가 친척같이 허물없이 지냈다. 
같은 동네였지만 정애네 동네는 윗동네가 되고 우리동에는 아랫동네라해서 
아이들 노는 모양새가 조금 달랐다.(아랫동네 애들이 더 세련)
정애네 집은 장마당가는 즈음에서 중앙관이라고 푸줏관과 식당을 하는 집이었는데 
웃집과 아랫집으로 두채가 붙어 있었다. 
웃집은 요정처럼 사람을 접대할 수 있도록 지은 영업집이었고 
아랫집은 허름한 살림채였다. 
웃집에서 엄마와 아버지가 영업을하시고 웬만하면 집안 식구들은 출입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장날이면 정애네 아랫집 담모퉁이에 장돌뱅이들이 진을 쳤다. 
들창문 사이로 발을 딛고 내려다 보면 물감장사, 땜쟁이, 신발장수등등... 
물에 풀면 예쁜색을 내는 물감이 신기해서 한참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5일장이 서는 날은 시골 아낙네들이 머리에 또아리를하고 석유와 기름등을 댓병에 담아
걸어가는데 위태해 보여 점으로 남아 사라질때까지 쳐다 보았지만 
요리조리 능숙하게 잘도 걸어가 깨빡치는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집에서 직접 기른 농산물과 가금류를 팔러 나온 사람들과 
사돈의 팔촌까지 볼 수 있는 만남의 장소가 5일장이 었다. 
요란한 뻥튀기 소리와 함께 천지를 뒤흔드는 고소한 냄새, 
김이 무럭무럭 나는 뜨끈한 잔치국수, 
돼지기름을 무우꽁댕이로 비벼 부친 부침개의 냄새는 입안에 절로 침이 고이게 했다. 
별다른 볼거리가 없는 어린애들은 장이 서는 날이면 
장마당전을 기웃거리며 이른바 아이쇼핑 즐겼다. 
장마장을 오가다 들리는 코스가 정애네 집이었다. 
아랫집에 들어서 "저엉애야 노올자아~!" 하고 부르면 조금 있다가 
" 그래 으응" 하며 정애는 조용하게 웃으며 나왔다. 
마당 등나무 그늘 아래 있는 펌푸에서 물을 퍼서 물장난도 하고 
여자만의 은밀한 이야기(정애는 언니가 많아 조숙했다)도하고 
그러다가 배가 고프면 웃집에 가면 정애 어머니께서 
가마솥에 설설 끓인 진국 설렁탕을 한그릇씩 차려 주셨다.  
마파람에 게눈 감치듯 먹고 심심하고 진력이나면 
우리집으로 쪼르르 달려가 놀고 
서로 바래다 준다고 길에서 왔다 갔다 하다 결국은 중간즈음에서 아쉬움을 뒤로한 채 헤여졌다. 
집안끼리 내왕하고 동기간이나 다름없는 친구였다. 
일부러 마음 먹고 정애네 집까지 찾아갔는데 정애가 없으면 
날개쭉지 부러진 새처럼 금새 풀이 죽었다. 
그리고 갈만한 델 찾아 다녔다. 
정애네 앞집 목수집 정화네나 포목점을 하는 동순이네 알만한 집 몇군데를 뒤져서 
정애를 찾으면 노는걸음 제치고 나를 데리고 자기집으로 가서 놀아 주었다.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깊고 조용하고 말 수가 적은 내친구 정애...
남의 음식을 죽어도 안먹어 조금은 까탈스러웠던 정애... 
어느날 우리집에서 자고 아침을 안먹고 가겠는걸 
우리 할머니가 "자고난 집에서 아침 안먹으면 호랭이한테 물려간다"고 하신 말씀에 놀라서 
두어숟가락 뜨고 불이나케 집으로 달려가던 정애.. 
우리집에 왔다 가는길에 갑자기 비가내려 우산을 씌워주려는데 
우산이 안펴져 내가 우산을 치들고 용트림하다  
우산살을 지지해주는 쇠로 된 장식이 갑자기 튀어나와 
앞니 끄트머리가 부러졌는데도 신경질 안내고 나를 안도시켜주던 정애.. 
가족의 개념으로 대해주시던 어머니와 4명의 언니들.. 
국민학교 6년동안을 말다툼 한번 없이 자매처럼 무탈하게 잘지낼수 있었던 건 
정애의 넉넉한 성품 때문이 였으리라. 
가설극장과 서커스 그리고 떠돌이 약장수들의 보금자리였던 장마당 터를 
오갈때마다 제집처럼 드나들던던 편안한 정애네 집... 
60년대 말경에 서울과의 소통이 원활해지면서 5일장이 사라졌지만 
우리 마음속에 한귀퉁이 추억의 공간으로 영원히 자리하길 바라며 회억해본다. 
지금도 전화를 걸면 보통이 두어시간이다.
컴퓨터를 하고 난 후부터 뜸해지긴 했지만서두..
함께 공유한 시간이 많았기에 우정의 두께도 더 두터웠고 이야기할 소재도 무궁무진하다. 
살아온 날보다 살날이 적지만 남은 시간까지 서로 의지하며
아름다운 우정 간직하고 살자 내친구 정애야!


정애야! 
넌 너댓살 때 장마당에서 나무장이 스는걸 봤다고 했지?
여명이 희끄므레  밝아올때 
나무꾼들이 하나둘씩 나무다발을 지고 와서는 
지게 작대기로 받쳐놓은 나뭇단 사이를 숨바꼭질하듯 다녔다고...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아슴프레하다고...

오학년때인가 네언니가 짜주었다던 보라색 흰색이 섞인 벙어리 장갑이 무척 부러웠단다. 
그후로 뜨게질 배워 내가 장갑짠거 너 모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