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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항에서 포옹 시간을 3분으로 제한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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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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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각


BY 남풍 2003-04-11

마을 뒷편 바다가, 육지가 되었다.
매립을 하기 위해 중기들이 오락가락 해를 넘기더니, 마무리 공사가 한창이다.
매립지와 마을을 잇는 도로 개설을 위해 마을의 집들이 헐려 나갔다.

아이들을 데리고 목욕탕엘 가기 위해, 평소대로 지나치다 보니,
한 귀퉁이가 '안전제일' 노란띠가 둘러쳐져 있고, 얼마전까지 집이 있던 자리에
집을 이루었던 목재와 시멘트덩어리들이 부서져 집터를 덮고 있었다.

오가며 볼 때는 그리 작은 집은 아니었는데,
집이 다 뜯겨나간 자리는 너무나 좁아서 그 안에서 한 가족이 살았다는게 도무지 믿겨지질 않았다.
하긴, 내가 살고 있는 집도, 일곱 사람 먹고 자고함에 큰 불편
없건만, 뜯어 내고 나면, 그 정도밖에 더할까.

땅 위에 벽을 세우고 지붕을 덮고 평면이 입체가 되면,
놀랍게도 식구마다 따로 방이 생기고, 방 안에 책상과 의자와
책들...
부엌과 냉장고와 냉장고 안 생선도막도....
삶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담아낼 공간이 된다.

목욕탕 뜨거운 김이 오른 천정에 대롱대롱 매달린 물방울들을
보면서도,
늘어진 뱃살 위에 거품을 내면서도 내 마음이 빈 집터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사람 사귐에 소극적이고, 남의 말을 들어 주던 쪽이던,
내가 요즘 들어 부쩍 듣기보다는 말을 많이하고 있다는 생각이,
내가 뱉어낸 말 중 반은 불필요한 것이고,
그 중 반은 제대로 뜻이 전달되지 않은 채 사람들 사이를 떠돌고,
그 중 아주 조금이라도 누군가의 마음에 내려 앉기는 했을까하는
염려와,
마음의 문을 열려고 한 것이 차곡차곡 정리 되어 있던
'마음의 집'을 부수고 만 것은 아닌지,
하여, 내 마음 안에 들어있던 많은 것들이
헐리운 집터 옆에 뒹굴고 있는 주인 잃은 소지품처럼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바디크렌저 거품처럼 일었다.

자신이 꽃이 되어 향기를 나누려 해도
피다만 꽃봉오리는 향기를 피울 수 없다고 목욕 바구니를 들고
돌아오며 생각했다.

살아 생전 끄덕 없는 견고한 벽과 A급 태풍에도 날리지 않을 든든한 지붕을 가진
마음의 집을 세워, 도로 개설에도 헐리지 않고,
허술히 누구도 침범할 수 없게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하루를 보냈다.


저녁 무렵, 낮에 김치 담아 갔던 통에
한라봉과 배달하다 남은 우유를 들고 친구가 찾아왔다.
집 정리를 하다보니 언젠가 써둔 편지라며 전해야할지, 말아야할지 모르겠다며
반으로 접힌 A4용지를 내밀었다.

날짜는 적혀 있지 않았지만, 다른 날 씌여진 세장의 편지는
하루 내내 내가 한 걱정을 덜어내 주었다.

한 장은 진실하게 내 얘기를 한 날, 자신을 믿어 주어 고맙다고
잊고 살던 편지도 쓰게 해주는 친구라고, '친구'라는 말을 다시 살아나게 했다고
또 한 장은 책을 빌려간 날, 묻어두었던 꿈을 꿈틀거리게 한다고
마지막 한 장은 이 나이에 친구를 얻는다는게 어렵다는 걸 알기에 너무 행복하다고
씌여진 편지를 읽으며,
적어도 내가 쏟아낸 많은 말들 중 적어도 한 사람에게는 가 닿았구나하며
게다가 이녀석 정말, 좋은 친구 맞구나하며
짝사랑하던 상대에게 고백 받은 것처럼 설레였다.

내 안에서 밖으로 나가면서 사라져버렸다 여겼던 것들이
세포분열을 하듯 친구 안에서 자라고 있었음을 확인하는 순간,
내가 지으리라던 견고한 마음의 집에는
철마다 꽃이 피고 열매맺는 아름다운 정원과
지친자 누구라도 쉬어갈 거대한 나무가 심겨지고,
넓은 벽에는 커다란 창문과 수시로 드나들 문이 달린다.

바보~
내가 담은 김치를 가져가면 내 김치는 없어져도 한라봉이 생기고,
김치가 없어지면 새로 담아야한다는 생각은 못하고 김치가 없어진다고
담을 높이려 했을까.
문은 안의 것을 꺼내 가기도 하지만, 밖의 것이 들어오기도 한다는 사실을
친구의 편지를 읽으며 깨우친다.

내 마음은 헐려나간 집이라서가 아니라,
너무 좁아 한칸 늘려 증축공사 중이라 어수선했던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