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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심기와 야생초 (지리산 아줌마 시골살이를 가끔 소개합니다.)


BY sharegreen 2003-04-09

근 일주일을 걸려 감자 한 박스를 심었습니다.
강원도 씨감자를 구해서 눈이 있는 곳을 중심으로 감자를 두세 조각 잘라 심는 일인데 오래 걸린 셈입니다.
집 옆의 텃밭에 15 여개의 이랑과 고랑을 내고 비닐을 씌워,
씨감자를 땅속에 묻기까지 5일 정도가 소요되었습니다. 더디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아직 강원도에서 사온 씨감자가 1/3박스나 남았고, 이웃 할머님이 심다 남았다고 싹이 오른 감자를 한아름 주었거든요.

물론 관리기나 경운기등 일체 농기계의 도움을 받지 않고 했습니다.
당분간 저희는 기계의 도움이 없이 농사를 지으려 합니다.
육체적 노동에 어느정도 우리 몸을 단련시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기도 하거니와,
생태주의자들에 의하면 밭을 기계가 갈 경우, 흙속의 지렁이나 미생물들에게 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라 하네요.

마당에 나가면 이 감자 심는 일말고도 할 일들이 많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러나 작물은 그 심는 시기를 놓치면 제대로 열매가 들지 않기에 우선적으로 감자 심기를 끝내야 합니다.
더군다나 겨우내 게으름 부리던 몸둥아리가 갑자기 심한 노동을 하니 팔을 들어올리기가 힘들고 온몸이 욱신욱신합니다.

그러나 어쩔수 없이 그제는 남은 씨감자를 마저 심어야하기에 땅을 일구러 윗밭으로 올라갔습니다.
덤불들을 쇠스랑으로 긁어내니, 그 밑에선 봄나물들이 잔치를 벌이고 있네요.
땅을 일구다 도저히 이 맛난 나물들을 뒤집어엎기가 아까워 쇠스랑을 팽개치고 돈나물, 냉이, 쑥을 캤습니다.
쭈그리고 앉아 느긋이 나물을 캐니 봄볕이 더 따사롭게 느껴집니다.
꽃다지들도 풀인데 어찌 정말 꽃처럼 보이는지....
감자심기와 야생초 (지리산 아줌마 시골살이를 가끔 소개합니다.)
(꽃저럼 둥그렇게 잎이 돌려나는 꽃다지. 진짜 꽃은 아주 조그만 노란꽃입니다.)
감자심기와 야생초 (지리산 아줌마 시골살이를 가끔 소개합니다.)
(그제 캔 나물들은 이미 소화가 되어 없고, 어제 잠깐 뜯은 쑥과 돈나물을 사진찍었습니다.)

순간 어떤 강박관념에서 벗어났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골에서 살아가는 일이 농사짓는 일과 뗄 수 없는 삶인데,
그간 책상물림으로 살아온 우리부부가 힘겨운 육체노동을 견뎌낼수 있을까? 견뎌내야 되지.'이런 강박관념이 알게 모르게 있었나 봅니다.
"그래! 오늘은 좀 쉬자.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가 아니라 '열심히 일한 나, 좀 느긋이 봄나물 캐도 된다.'"이렇게 혼자 중얼 거리며,
쇠스랑을 내팽개치고 오후 두어 시간동안 봄나물 캐기를 즐겼습니다.

어떻게 보면 좀 게으름을 부렸지만,
그 덕으로 저녁상이 푸짐했습니다. 냉이 된장국에 돈나물 무침. 아이들도 냉이를 속속 잘도 골라 먹었습니다.
갓 올라온 연한 쑥으로 쑥개떡을 대충 만들어 아침거리로 내니 야호! 이만한 아침식사가 또 어디 있을까 싶네요.

어제오후 한나절, 윗밭을 마저 일구어 비닐을 씌워 두었다가 오늘 오전 감자를 마저 다 심었습니다. 아랫밭에 감자 심는 일은 5일이 걸렸고, 윗밭은 하루하고 반나절이 걸렸습니다.
아랫밭에 심은 감자가 조금 많았을 뿐인데, 왜 이런 시간 차이가 있나 생각해보니, 간단한 원리입니다.
몸둥아리가 노동에 어느정도 익숙해졌다는 것.
며칠에 걸려 조금씩 하던 일을 한꺼번에 해내는 끈기가 생긴겁니다.

감자를 다 심고 나니 남편이 그제사 올라옵니다.
남편은 며칠째 오전동안 돌담 쌓는 일에 몰두하고 있었거든요.
올라오더니 "어! 벌써 다 심었네." 합니다. "나 이제 농부 다 됐지?"
나머지 일을 이리 빨리 끝내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내가 생각해도 신기합니다.

감자를 다 심고 나니 조금 마음과 시간의 여유가 생깁니다.
화단에 꽃씨도 심고, 마당에 토끼풀을 옮겨심는 일도 하고.....
농사철의 본격적인 시작은 이 감자 심기에서 비롯되지만 감자를 심고 나면 다음 작물을 심기까지 조금 시간의 여유가 있지요.
그동안은 다음 작물 심을 준비도 해야하지만, 봄나물을 많이 캐두고 싶습니다.

'야생초 편지'의 저자 황대권씨는 야생초를 뜯어 생으로 먹기도 하고 말려서 차로 즐기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처럼 저도 이 생명력이 끈질긴 봄나물들을 차로 한번 즐겨보자는 생각이 드네요.
저자는 긴 감옥생활을 야생초 연구와 야생초에 얽힌 사연을 편지로 쓰며 감옥 밖에서 사는 자유인보다도 더 많은 세계를 품고 살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문득,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들은 어떤 정해진 감옥에서 사는 것이 아닌가!'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이어가는 나름대로의 일상에서 쉽게 벗어나, 원할 때, 원하는 곳으로 자유자재로 움직이며 사는 생명체가 얼마나 될까요?
특히 인간은 가정에서, 직장이란 곳에서, 하루하루의 생활에서 벗어나면 더 불안해지기도 하죠.
가끔 세상구경을 위해 여행을 하기도 하지만 (재소자들도 사회참관이라고 해서 세상구경을 가끔씩 나간다고 합니다),
궁극적으로는 자신이 뿌리내린 곳에서 멀리 달아날 수 없는 것이 지구상의 생명체란 생각이 드네요.

어떤 친구들은 저에게 묻습니다. "시골구석에서 갑갑하지 않니?" 물론 그럴 때도 있습니다.
시골에서나 도시에서나 일상생활이란 테두리에서 살다보면 갑갑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차피 테두리란 일상이 있는 감옥에서의 삶이라면 그 테두리를 의식하지 말고 사고의 범위를 좀더 넓히고, 어떤 일에 몰두하면
자유로울 수 있다고.' 야생초 편지의 저자처럼 말입니다.

저는 봄나물을 보며 '저 나물로 차를 우려내 마시면 즐겁겠다'란 생각으로
내 사고의 틀을 좀 더 넓혀 자유로워지고 싶습니다.
또 이런 생각을 하게 한 '야생초 편지'의 저자 황대권씨에게도 감사합니다.
감자심기와 야생초 (지리산 아줌마 시골살이를 가끔 소개합니다.) 감자심기와 야생초 (지리산 아줌마 시골살이를 가끔 소개합니다.)
(우리가 심은 감자밭. 싹이 올라올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