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준비를 하려고, 막 도마를 꺼내는 중이었다.
일회용 장갑을 낀 채, 옆 집 언니가
"이따 저녁 먹으러 와라.
닭 국수했으니까."
아침은 아이들 체험학습 간다고, 윗집에서 김밥을 준비해 식구들
먹을 것까지 챙겨 주더니,
하루 종일 별 수고없이 저녁 식사까지 해결하게 되어
난데 없는 여유를 부리고 있었다.
맛있는지 더 달래서 먹더니,
국물까지 다 마신 아이들이 일어난 자리에 앉아 한그릇 가득 담아낸 국수를 후루룩 거리며 먹었다.
잘 고아놓은 닭 국물이 담백하여, 국물도 남김없이 마시고,
커피 한잔 마시며 좋은 이웃 덕에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계세요? 여기 혹시 담배집 언니 있어요?"
나를 찾는 방문객에 놀라 문을 여니,
"오늘 생일이시죠? 꽃배달 왔습니다."
어두운 수족관 앞에서 중년의 여인이 장미 꽃다발을 내게 안기고는
누가 보낸 거냐고 물어도 모르겠다며 얼른 주고는 나가 버렸다.
언니들이 더 놀라 달력을 들춰보며, 생일인데 몰랐을까봐 난리다.
'생일을 축하합니다. 항상 웃으며 사시고요, 행복하세요.
그리고 부자 되세요.'
금 가루 뿌려진 붉은 장미 다발을 싸고 있는 보라색 부직포 사이에 꽂힌 카드를 읽어도 누가 보낸 것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정말 생일 날이라면 가장 먼저 남편을 떠올리겠지만,
남편이 꽃배달을 보낼 사람인가는 둘째치고, 적어도 나를 위해 아이들을 데리고 케익을 사야 하는 날이 음력으로 세어야 함을 알고는
있을 것이고,
그 날도 잊어버릴 남편이 보다 일찍 보냈을리는 만무하고....
이 사람 저 사람 다 떠올려봐도
정작 가까운 사람들은 아닐테고
내 주민등록 번호만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커다란 꽃다발을 보냈을리 없고......
"언니, 나 집에 갈래. 가서 전화나 기다려야지."
"밝혀지면 연락해라. 너무 궁금하다."
꽃을 안고 있는 가슴이 울렁 거린다.
다른 사람을 놀라고 감동하게 하는건, 나도 잘하는 일이지만,
한 번도 자신을 밝히지 않았던 적은 없다.
많은 사람의 얼굴이 떠올려졌다 지워지고,
혹시하는 마음에 몇군데 전화를 해도 다 아니란다.
.
.....
컴퓨터 모니터 위에 세워놓은 장미들은 아침이 되어도
여전히 궁금증을 일으키면서,
기억 속의 모든 얼굴들을 꺼내보고,
일상을 같이하는 사람들을 돌아보게 한다.
나에게 두배의 감동을 주고 싶어한 이가 누구일까?
그 누구라 하더라도 내가 누군가에게
'꽃다발을 안겨주고 싶은 그녀'라는 사실은 나를 기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