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잔한 봄바다,
발그레 물들어가는 노을을 배경으로, 낡은 흰색 프라이드가 경적을 울리고 있다.
“어디 가시게요?”
“어? 윷판에서 돈 땄다고 갈비 사준다네.”
시어머니가 꽤 가벼워진 옷차림을 하고, 급하게 나오고 있다.
“어머니, 나는?” 따라 나갈 상황도 아니면서, 공연히 시샘하는 말을 한다.
“갈래?”
“아니, 가게 봐야죠. 애들이라도 데려가지.......”
방안에서 실컷 떠들고 있는 세 명의 아이들 몫으로 갈비 구워다 준다는 말을 남기고 어머니는 웃으며 나간다.
60대의 연인을 태운 하얀 차가 서있던 자리에, 노을대신 희미한 어둠이 채워져 가고 있다.
아름다운 노년, 그것은 누구나 꿈꾸는 일이다.
부부가 경제적 걱정 없이 살면서, 두 손 꼬옥 잡고 천천히 걷고 있는 모습은 더 없이 아름답지만, 홀로 남겨진 노년은 쓸쓸하게 여겨진다. 저런 연인마저 없다면 말이다.
이제는 저렇듯 아름답게 보이는 풍경이 10년 전에는 왜 그렇게 남세스러워 보였나 모르겠다.
10년전, 나이 스물셋에 유난스레 잘 울던 딸아이를 낳고,
여든다섯 살 시할머니와 쉰다섯 살의 시어머니가 계신 시집에 들어와 살기 시작했을 때, 기괴한 풍경에 적응이 되지 않았다.
결혼식도 올리지 않고, 아이를 낳고, 시집에 누워 있는 내 모습도
그랬지만, 여든 다섯의 노할머니가 “애기엄마는 잘 먹어야 한다.”며 들고 들어오는 호박 된장국과 김치만 든 얕은 밥상을 받는 일도, 출산한 며느리와 갓난이 손녀딸을 두고 어스름만 되면 나가서 밤이 되서야 대문 삐걱거리며 들어오는 시어머니도 내가 아는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아기 옆에서 할머니는, 놀러나가는 며느리 잡지도 못하고,
중얼중얼 하던 끝에 눈물을 찔끔거리고, 전후사정을 아무도 설명해 주지 않았지만, 시어머니가 연애중이라는 사실은 짐작할 수 있었다.
20년 전에 과부가 되신 시어머니는, 시아버지 병치레로 빈털터리 되다시피한 살림 속에,
할머니 모시고 아들 셋을 키우기 위해 배와 배 사이를 오가며 생선을 사고 팔면서 험한 홀로서기를 하셨다.
그러던 중, 부두 끝의 부식 집 겸한 담배 집을 하게 되었고,
아들 셋 대학까지 보내고, 큰 아들 장가보낼 쯤, 어머니 마음에 틈이 생겼나 보다.
아마도, 홀로 자식들 키우느라 쌓아놓았던 20년의 긴장을 조금씩
풀어가기 시작했던 모양이다.
쉰 넘어 하는 연애는 저녁마다 노래방에 가서 노래하다 오는 게
거의 전부였지만, 연애의 설레임이나 가슴 벅참은 나이와는 상관없는 일 같았다.
한 동안은 새 며느리에게 쑥스러워 아닌 척 했지만, 끼니때면 나가 혼자 사는 연인의 식사를 차려주는 것 같았다.
몇 해 전, 여름 끝에 태풍이 심하게 불어온 날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바람이 심한 부두에는 휩쓸어갈 듯한 파도가 방파제를 넘었고, 허름하고 야트막한 슬레이트 지붕이 날아갈 것 같았다. 뜬 눈으로 밤을 새우고, 조금 잠잠해진 아침이 되자, 여기저기서 날아든 쓰레기들을 한참을 치우고 있어도 어머니가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어머니를 부르며 방문을 열어보니, 안 계셨다.
혹시나 아저씨의 집에 전화를 걸어봤다.
태연한 어머니의 목소리.....
고민 끝에
다음 날, 재혼하시는 게 어떠냐고 어렵게 말을 꺼냈다.
어머니는 버럭 화를 내시며, 더 이상 말도 못 꺼내게 하셨다.
어느새, 아이가 셋으로 늘었고, 십년을 어머니 곁에서 살면서,
차츰 어머니를 이해하게 되었다.
재혼을 권유한 것은, 어머니를 위한다는 미명아래 동네사람들의
수군거림을 피해보려는 얕은 계산이었다는 생각도 든다.
아이들이 불쌍해서 매도 한 번 든적 없는 어머니는 혼기 찬 아들들에게 복잡한 가정 사를 가지게 하고 싶지도 않았겠거니와,
그 나이에 결혼은 연애의 기쁨대신 의무만 가져다 줄 거라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재혼할 의사가 없음을 안 다음부터, ‘말리지 못할 거면 인정하자’라는 생각에 아저씨의 밥상을 차렸다.
시아버지 밥상 차리는 기분으로 말이다.
어차피 어머니의 인생의 빈곳 자식들이 다 채울 수도 없는 일이며, 다시 찾은 생의 즐거움에 기꺼이 박수치고 싶어졌다.
자식은 자식일 뿐, 기대고 싶은 연인이 되지는 못 할 테니까.
돌아가신 시아버지께, 죄송스런 일일지 모르지만,
다시 피어나는 여인으로서의 어머니가 아름답게 여겨는 지는 것은
내가 발칙한 며느리이기 때문일까?
어쩌면, 어머니의 연애는 나의 시집살이를 수월하게 해 주고 있을지도 모른다.
고부간의 갈등이라는 거,
사실 젊은 며느리에게 자리를 뺏겨 가는 늙은 시어머니의 한탄으로 시작 되는 것이 아닐까?
사랑에 빠진 사람은 매사를 긍정적으로 보고,
사람에 대해서도 관대해 지니,
나는 그 틈에 헐렁한 시집살이를 하는 셈이다.
올 겨울, 어머니는 아침부터 밤늦도록 수협 어판 장에서 언 생선의 배를 가르고 비늘을 벗기면서, 손이랑 뺨에 동상이 걸리며 번 돈을 통장 째로 주셨다.
그러고도 약국에서 연고를 사다 주는 사람은 아들도 아니고 며느리도 아닌 시어머니의 연인이다.
경제적으로는 서로 독립해 있으면서,
마음은 의지 하며 살아가는
60대 연인 아름답지 않나요?
연애하는 시어머니와 박수치는 며느리,
우리 고부 사이는 묘한 공범의식으로 뭉쳐 있다.
아저씨가 바다에 낚시 나갔다 들르면, 식사를 챙겨드리고,
그 사실을 아는 어머니는, 대견스런 며느리를 웃으며 바라보신다.
댓가로 나는 왠만한 잘못도 눈 감아 주는 어머니의 웃는 얼굴을
얻었고,
덤으로 내 아이들에게도 할아버지 냄새가 배이고 있다.
옆집 사는 외숙모가 어머니에게 기저귀 갈아줄 딸도 없는데,
치매 걸리면 어쩌냐고 조심하라는 말에,
“저 있잖아요. 딸 같은 며느리.”하며 끼어들며 하는 내 말은 진심이다.
60대에 연애하는 우리 어머니,
치매 안 걸릴 것이라 생각하는데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