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여년 만에 선후배가 모여 한달에 한번 영화도 보고 얼굴도 보자고
만든 모임이 하나 있다.
영화관도 없는 읍에 읍민으로 살아가는 나를 위한 시민들의 배려로
영화 관람은 제의 된 것이지만, 한달에 한 번 자신을 위한 장거리
외출이 쉽지가 않다.
두 달을 걸러, 영화는 못 봐도 얼굴이라도 보자고 늦은 저녁 시간
어렵게 모였다.
두 달간 밀렸던 이야기가 술잔을 채운다.
선배 하나, 동기 하나 후배 셋인데, 그 중 내국인 면세점에 다니는 후배는 새벽 근무라 자야 한다고 빠지고,
전문대 강사인 후배도 학과 모임이라 빠지고,
모임 성원은 아니지만, 술집 주인인 후배까지 아줌마 다섯이 모여
시끌하다.
다른 나라 말로 먹고 살아 보겠다고 다닌 학교였지만,
지금 보니, 전공이 밥벌이 수단이 되고 있는 사람은 반이 채 못 된다.
베트남 이민을 생각 중인 선배는 현장 답사 겸 지난겨울 다녀 온
베트남 이야기에 열을 올리고 있다가, 나갔다 오더니
“고객인데, 내 이름까지 기억하네....”하며 웃으며 들어온다.
화장품 세일즈 겸 피부 관리를 하고 있는 선배의 고객... 선배의 뚜렷한 입술 선에 립스틱이 빨갛다.
둘째 아이를 키우는 문제 때문에 친정에 사는 선배네 가족, 선배의 남편은, 요즘 출근하기 전에 장인과 함께 폐지를 모아 팔아서 생활비를 번다고 은근히 자랑하는데, 마음 아프게 들리진 않는다.
혼을 담은 듯 탈춤을 추던 선배의 남편, 폐지 뭉치를 들고 있는 모습도 그리 나쁜 그림은 아니다.
방수공사 업체를 하는 남편을 따라 남의 집 물샐 틈을 막아 주는
친구 옆에, 한 바늘 한 바늘 꿰매 만든 퀼트 손가방이 있다.
꼼꼼함이 천성인지, 아이를 재우며 시작한 바느질이 이제 문화센터 강의를 맡아달라는 제의를 받을 만큼 전문가가 되었다.
작년인가 공동전시회를 가졌는데, 나는 뭐했나하는 생각이 들만큼
충격이었다. 이 친구는 언젠가 퀼트shop을 갖게 될 것이다.
퇴근하는 길에 맡겨 뒀던 자기랑 꼭 닮은 딸을 안고 있는 내국인 면세점 유니폼을 입고 있는 후배는 유명한 과 커플이었지만, 보험회사 영업소장인 남편과 오래 떨어져 살고 있다.
그래도 후배는 전공과목이 제 몫을 하고 있는 셈이다.
의자 한쪽에 자리 잡은 이 술집 주인 후배, 틈틈이 자리를 같이 한다.
친정아버지 건물이긴 해도, 그간 꽤 야무지게 살았구나하는 생각이 든다.
“요즘도 글 쓰니?” 언젠가 아컴의 글을 읽은 선배의 물음에
내가 쓴 글이 실린 잡지 한권을 보여주자, 동화까지 쓰냐고 놀란다.
“어차피 잡문이란, 동화도 되고 수필도 되고 시도 되는 법이야.”
문학을 공부해 보지 그러냐고 아쉬워 하는 친구의 말에
글 잘 쓰는 사람들 많은 데 가서 못 쓰는 사람 되느니,
글도 쓰는 담배집 아줌마로 사는 게 낫다고 대답했다.
자식 대학 보내려고 안간힘 쓰는 부모들이 우릴 본다면, 굳이 대학 가야 할까 고민스러워 질만큼, 4년을 같은 강의실을 들락 거렸어도, 너무나 다른 모양으로 살아간다.
그러나, 그 다른 모습 중에서도 닮은 점이 있다면,
삶을 적극적으로 풀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삶이란 물처럼 담기는 그릇에 따라 달라지는 것 같다.
어려움들은 삶의 부산물 정도로 생각하는 통 넓은 그릇들을 만나니,
내 마음 그릇도 넓어지는 것 같다.
“그런데 SOL이 무슨 뜻이니?”
선배가 간판 이름을 보고 묻는다.
“어? 소나무 아냐?”
“나는 도레미파솔에 솔인 줄 알았는데?”
“향기가 솔솔난다는 뜻 아닌가?”
의심도 없이 소나무라고 생각했던 나는 제 각각인 반응에 놀란다.
후배는 웃으며
“ 그런 뜻도 물론 있지만,Symphony, Opening, Labor, 사람들끼리 조화롭게 살려면 서로 마음을 열고, 서로를 위해 수고나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는 얘기예요.”
간판 이름보고 떠 올린 생각이 이리 다른데,
어찌 사는 모습이 같을까.
그러나 조화롭게 살기 위해선, 서로 마음을 열고, 수고로움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는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인다.
빈 술병은 많아지고, 도시의 밤은 깊어 간다.
내 마을 항구는 잠들었을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