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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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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두와 남자


BY 모퉁이 2003-03-21

어느날,,
퇴근주를 하고 가겠다고 전화 한 통 넣고는
깜깜밤이 되도록 소식이 없더니 날은 새지 않고 돌아오긴 왔다.
[늦은 밤에 무슨 대화를 하겠소까 다음 날 날새면 봅시다] 하고
취한 잠 다시 청했고 날은 새서 아침 출근 준비하는데
현관에는 왠 낯선 신발이 놓여져있다.

잘 닦아주지 않아서 윤이 날리 만무한 구두가 제법
광채가 나고 어쩐지 낯설음에 훔쳐본 신발은
내가 사 준 구두의 상표가 아니었음에 적잖이 놀랄밖에..

왠일이냐고,, 지각을 하더래도 자초지종은 들어야겠다고
밥상머리에 앉혀놓고 지난 밤 이야기를 듣는데
이 또한 가관이라...

소주 한 잔 하려고 삼겹살집에 갔다가
기분좋게 취할 무렵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본인이 보기에만 취하지 않은 눈으로
아무리 찾아도 내 눈에 익은 구두가 안 보이고
내 발에 맞는 신발이 없더라는 것이다.

한사람 두사람 자기 신발 다 찾아 신었는데
이 남자 없어진 신발 찾느라고 얼굴에 피가 쏠리던 판에
허름한 슬리퍼같은 신발 하나 찾았으니 이 일을 어쩌나.

주인 할매 난색한 표정 어쩔 줄 몰라하고
어지간하면 슬리퍼라도 신고 오겠구만 이건 아니올시다 였으니
보다 못한 주인할매 골목안 제화점에 가서 얄궂은 모양의
구두 한켤레 사다 주셨다는데....

요즘 어지간한 음식점에 필수적인 문구가
'신발 잃어버려도 책임없음'이라고 쓰여져 있다.
그럼 누가 책임지라는거여?
비닐봉지 매달아 놓고 거기다 넣어 보관하든지 말든지
알아서 마음대로 하라는 암시를 해 놓았긴 하지만
어디 그렇게 챙기는 사람 몇이나 되는가.

그래도 박박 우기면 잃어버린 신발 책임진다는데
왜 말도 못하고 왔냐고 하는 나에게
그 할매 얼마나 팔아서 신발값 물어주겠냐고
이것도 고맙지 뭐..하며 넘어간다.

큰맘먹고 구두 한켤레 새로 장만하라고 말했다.
퇴근 길에 시간나면 다녀오겠다고 전화 한 통 또 준다.

신발을 사고 걸어와도 올 시간이 지났는데 감감하더니
전화벨이 울린다.
오는 길에 누구씨를 만났는데 당구 한 게임만 하고 가잔다고 한단다.
그 사람은 자기 오는 길목에 지키고 있었나 어째 운명처럼 그렇게 만난대?
미리 짜고 치는 고스톱인줄 알면서 모른척 그러라고 했다.
신발이나 잘 챙겨오라고 일침을 가했다.

열두시는 넘기지 않았두만.
기분좋게 들어오는 손에는 빨간 가방이 들려져 있었고
나는 구두에만 관심있는 사람마냥 가방부터 열었다.

헉~!하고 놀라고 싶었지만 참았다.
칫~!하며 놀리고 싶었다.

앞코가 넓적한 것이 스물 다섯살 조카가 신었던 구두와 비슷하다.

"당신 이 구두 소화해 내겠어?"

"이 사람아~! 신으면 신었지 무슨 소화여?"

"아니..너무 젊은 스타일 아니여?"

술김에 잠이 쏟아지는지 벌써 자리에 누워
푸푸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다.

다음 날 아침,제일먼저 집을 나서는 작은 아이에게 묻는다.
아빠 신발 어떠냐고..
후후..딸아이 당연히 웃지.
그래도 괜찮다고 위로(?)섞인 한마디 남기고 현관밖으로 사라진다.
"아빠~멋쟁이~~~"

구두에 맞게 좀 얍삭한 옷으로 차려입혀 보냈다.
아침부터 자꾸 베시시 웃음이 나왔지만 참았다.

퇴근 후.
언제나 습관처럼 묻는다.
오늘 뭐했냐, 어땠냐...

대답은 뻔하다.
그냥 그랬다.아니면 드물게 이러구저러구 어쩌구저쩌구..하고 사설을
늘어놓기는 한다.

이번엔 내가 묻는다.
"오늘 어땠어~?"

갑자기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하하하...사무실에 누구씨가 그러더란다.

"신발을 보니 20대인데 올려다 보니......@@??"

여기까지 그 분이 하신 말씀이고 나머지는....

"허허허.. 10대로 보이냐?"

오늘도 그 구두 신고 열심히 일하러 나간 사람에게
아침 인사로 20년째 하고 있는 살짝 입맞춤을 하고 보냈다.

그래..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지.
지금이 아니면 언제 그런 멋(?)을 부려보겠나.
맨날 늙어가느니 늙었니 하면서 쳐다보았는데
아직 마음은 젊고 싶었나 보다.
내가 그렇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