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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풍이 불면


BY dolbuda 2003-03-16

남풍이 불면


남풍이 분다. 누군가의 노래처럼 산 넘어서 남풍이 불어온다. 이파리보다 꽃을 먼저내어놓는 것도 남쪽에서 불어오는 따뜻한 바람의 영향일 것이고, 삭막한 거리에 말뚝처럼 겨울을 박혀있던 가로수가 잎을 틔워 낼 거라고 기대하는 것도 이 남풍이 부는 까닭일 게다.

봄은 늘상 이 바람을 따라 들어왔다. 종종 꽃이 피는 것을 샘하는 시베리아 기류의 꽃샘 추위도 있지만 남쪽에서 밀고 올라오는 이 기운을 어쩌지는 못한다.

남풍에 어울리는 꽃은 역시나 개나리일 게다. 겨울의 손아귀에서 해방되었음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꽃, 사실 오래전 삼동부터 동백은 피어 주변에 있었지만 움츠린 가슴으로는 그 꽃을 화사한 색감으로 받아들이지 못했고 노란 빛깔의 개나리를 보고서야 꽃으로 깊숙이 받아들이게 되기 때문이다.

남풍이 분다. 꽃을 꽃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던 계절로부터 꽃을 보는 반가움으로 매일을 채워도 될 계절로 몰고 갈 봄바람이 분다.

남풍이 부는 이맘때면 문득문득 죽어서도 살아있는 눈들이 생각이 난다. 정확히 언제였는가 하는 기억도 없는.

당시 부락은 부촌에서 점차 하향곡선을 그으며 쇠락해져 가고 있는 중이었다. 많은 지폐를 저장해 둘 곳이 없어 커다란 항아리에 담아 두었다가 그만 거기에 곰팡이가 피어 팔촌 당숙이 덕석에 내어 말리느라 지켜 앉아 있었다던 큰 집도 허물어지고 있는 중이었고 '어벙호'라고 하던 배 한척이 말뚝에 목을 맨 채 어느 시간까지 폐선의 기억으로 남아 있던 부락. 그러나 왜 부락이 그렇게 빈곤하게 되었는지 누나들은 모두 부락을 떠나 돈을 벌러 도회지로만 빠져나가고 있었는지 어린 나에게는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남풍이 불어오기 시작하면 열에 들뜬 사람 마냥 오동나무만을 찾아 헤매었던 기억, 그 기억의 시작은 바로 배 띄우기 놀이로부터 시작되었다. 배 띄우기 놀이.

부락에서는 그런 궁핍해져 가는 상황에서도 남풍이 불어오면 조무래기들이며 그래도 나이가 제법 찬 형들을 중심으로 그 행사를 꼭 치루었던 것 같다. 잘 다듬은 오동나무배에 돛을 달아 북쪽으로 띄워 보내는 건 머리가 굵은 형들의 몫이었고, 그 흉내를 내어 조악한 오동나무 배를 띄우는 건 우리들 조무래기의 몫이었던 그 배 띄우기 놀이. 나를 비롯한 조무래기들은 작은 조막손으로 오동나무를 깎다가 다친 손가락 몇 마디에 헝겊을 동여매고서도 기분좋은 콧노래를 부르며 키를 달고 배이름을 적고 돛에다가 소망을 적고서는 정성껏 달아 붙이던 놀이였던 것이다.

그 즈음의 선창가는 마치 연등놀이의 그것처럼 크고 작은 돛배들로 가득 차 있었다. 둥둥실 떠다니던 그 중 일부는 작은 돛 가득 남풍을 안고 어디론가 떠나갔고 그 중에 더러는 어디 쯤에서 바람을 잘못 만나 뺑뺑이를 돌다가 뒤집혀 파도에 밀려 갯가로 밀려들곤 했다.

어느 해였던가. 오동나무를 구하지 못한 나는 막내 누나를 삼동 내내 보챘다. 그믐을 보내고 정월 대보름을 지나도록 오동나무를 구하지 못한 나는 눈에 독을 품고 누나를 쫓아다니며 칭얼거렸던 것인데, 국민학교 상급생이었던 누나로서도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던지 그렇게 매일을 성가시게 구는 나를 데리고 하루는 부락의 뒤편으로 갔었다.

나는 영문도 모른 채 부락 뒤편 바위틈에 곧잘 밀려와 끼어 있던 우끼(부표)라도 찾아 주려나 싶어 졸랑졸랑 따라갔던 것인데 누나는 도중에 나를 세워 놓고 수면으로 떠밀려다니던 부패한 갑오징어를 가리키며 건지라는 거였다.

누나의 의중을 알 수 없었던 나는 시키는 대로 그놈을 건져 올렸다. 남풍이 불어올 조짐이 보이면서 부락 주변으로는 갑오징어가 많이 밀려들었고 그 중에 일부는 한식파도 즈음에 파도를 만나 수면으로 떠올라 밀려다니던 놈들이 많았는데 내가 건져 올린 것은 바로 그런 놈이었다.

나는 무엇 때문에 오랜 시간 밀려다니다 먹지도 못할 만큼 부패한 갑오징어를 건지라는 건지, 그놈이 남풍에 띄울 오동나무 돛배와 무슨 연관이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지만 시키는 대로 건져 올렸더니 누나는 심하게 풍기는 악취에도 아랑곳 않고 갑오징어의 등뼈를 발라내 바닷물에 깨끗이 씻고는 나를 돌아보며 그랬다.

"갑오징어는 멀고 거친 바다에서 봄을 따라 올라와 우리 부락을 지나간데"
"?"
"수많은 떼가 구름처럼 말이야."
"그래서?"
"봄바람을 타고 북쪽 어디론가 올라가려고 심한 파도를 무릎쓰고 이곳까지 온데."
"누나!"
"그러다 공기주머니에 바람이 들어 물위로 떠오른다는 거야."
"에이 씨, 그게 어떻다는 거야!"

기어코 나는 누나를 쥐어뜯고야 말았다.

"배 띄운다고 오동나무 구해달라 그랬잖아? 대신 저 갑오징어 등뼈로 배를 만들면 되잖아"

남풍이 불면 나는 왜 그날 그 갑오징어를 누나의 말대로 그것들에 돛대를 꽂고 돛을 달아 남풍에 띄워 보내지 않고 그 자리에서 누나를 쥐어뜯으며 그놈을 바위 위에 놓고 두 발로 지근지근 밟아 조삭거려 버렸는지, 가고 싶은 곳까지 대신 돛으로 바람을 받아 더 올라가라고 놈들을 바람에 태워 보내주지 못하고 우악스럽게 깔아뭉개어 버렸는지를 생각하며 지긋히 웃음을 베어물며 이 봄바람이 지나왔을 남쪽 하늘을 건네다 보곤 하는 것이다.

내 커다란 욕심의 돛을 매달만큼 갑오징어 등뼈는 등판이 넓지를 못하였고, 남은 다 좋은 오동나무 돛배를 띄워 멀리 보내는데 좁은 돛으로 얼마 못 가고 뒤집힐 갑오징어 돛배가 부끄러웠던 것이었을까?

남풍이 분다.

오늘같이 이렇게 남풍이 불면 안간힘을 써도 더 이상 가고 싶은 곳까지 가지 못하고 파도를 만난 갑오징어처럼 이쪽의 땅에서만 떠도느라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하고 있는 수많은 이들이 생각되어진다. 남풍에 돛을 달아 오를 수 있는, 사계절 중에서 유일하게 희망이 시작되는 이 봄날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