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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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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웬수


BY 雪里 2003-03-14

밤 열시가 다돼서야 거실로 들어서는 내게
거실에 앉아있던 온 가족들의 시선이 쏠린다.

가방을 들지 않은 한손의 손바닥을 보이면서
어깨를 들썩하고 외국영화에서 자주보던 포즈를 취하며
머쓱함을 줄여 보려는데 아들이 한마디 한다.

"어디 다녀 오세요? 빨간색 옷까지 입고...?"
"우수상턱 낸다길래 먹으러 갔다 왔다, 왜?"

"지금이 몇신데요?"
"저녁먹고 라이브카페가서 노래듣고, 세스폰연주까지 듣고,
오천원이나하는 키위쥬스마시고..."

"어라~? 엄마 수준높게 나가시네. 엄마가 그비싼 카페엘 가요?
어떻게 마셨어요? 한끼밥값을 주고..?"

"엄만 안되는거냐? 이 엄마도 그런데 갈줄알어, 다만 그동안 살기에 급급해서 분위기 같은건 잊고 살았을뿐이지. 근데,너무 좋더라!
자기, 우리둘이 가요, 거기..."

나는 철없는 아내가 되어 남편옆자리에 바짝 다가 앉았다.

어디가서 저녁을 먹었으며, 메뉴는 무엇이었고,
복분자술을 작고 예쁜 유리잔에 채우고
"위하여~!"를 했는데 정말 즐거웠으며
식사후엔 옆에 위치한 카페에가서
노래와 섹스폰 연주까지 듣고 왔노라며
하나하나 빼놓지 않고 보고(?)하는 나를 진지하게 쳐다보며
웃음으로만 대답하고 한참을 더 쳐다보고 앉아 있더니
이 멋없는 남자,한마디 한다.
"자기 재밌었으면 됐어.얼른 씻고 자~"

가끔 한번씩은 그렇게 그런 시간을 가지며 살고 싶다.

큰아들 나이만큼의 세월동안 나를 망각한채
장사를 해가며 많은 가족들에게 신경쓰느라고
바둥거리며 살아왔던 시간들이 빠른 슬라이드 필름처럼
잠깐동안 눈앞을 훑고 지나간다.

많이 힘들었던 순간을 잘 참아낸것에 스스로 대견하고
지독하게도 아끼며 살아온 덕에
남보기는 하찮을지 몰라도
이렇게라도 살수있게 된것 같은 마음이 들어 뿌듯하다.

몇년전 허리 수술을 한뒤로
시원찮은 몸때문에 밤이면 고통으로 몇번을 뒤척일때마다
깊은잠을 깨어 내 아픈 다리를 주무르는
남편의 커다란손끝 사랑에 고맙고 미안해서
참고 참다가 끝내는 비명이 나와버려
단잠자던 남편을 몇배 더 당황하게 해 버리고는
내 아픈 다리를 맡겨놓고 잠을 청하는 순간에 나는,
내 급한 성질을 잘 참고 받아줬던 늘보 남편의 늘보 성격을
감사하게도 생각한다.

오래전 텔레비젼의 프로중 시골의 노인들을 상대로 했던 프로가 있다.
할아버지가 메모된 쪽지를 읽고 맞은편의 할머니에게 설명을 하면
낱말을 맞추는 거였다.
한 할아버지가 나오셔서 "천생연분"이라는 쪽지를 보고
할머니에게
"당신과 나 같은 사이"라고 했을때,대뜸 나온 할머니의 말씀
"웬수~!"

"아니, 아니, 네글짜~!"
"평생웬수~!"

오랜 세월동안 할머니가 사시면서 얼마나 힘드셨던지를
할머니께서 곧바로 대답하신 그단어 하나로도 충분히 짐작이 가지만,
오랜세월뒤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잘 참고 살아오신 세월의 고마움을 가슴에 담곤,
쪽지에 적힌 단어를 읽으시면서 그렇게 표현하신거였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장면이다.

늘보라고 내가 붙여준 남편의 별명에 걸맞게
내 늘보는 늘 언제나 늘보처럼 움직이면서 급한 내 성격을
파닥거리게 만들지만
어제밤처럼 내가 즐거워하는 모습 그냥 웃으면서 보아주고
또 나는 그옆에서 편하게 보고 할수 있으니
이만하면 나중에 우리 둘중 하나가 편히
"천생연분"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가 싶다.

지금 몇번을 생각해도 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
이 할아버지와 할머니얘기를,
얼마전 나는 내 늘보에게 들려주면서 함께 웃었었는데,
시골로 어제 얻어온 나무를 심으러 간 남편에게서
조금전 전화가 걸려왔다.

"평생웬수! 뭐하셔? 앵두나무는 어디다 심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