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남편과의 첫만남을 기억하지 못한다.
요란한 카페에서 남편은 '싱싱하고 유쾌한 젊은이들' 속에 파묻혀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그 날 무슨 말을 했는지, 어떤 웃음을 웃었는지, 무슨 옷을 입었는지도 생각이 안 난다. 그 날의 나는 나의 기억보다는 남편의 기억에서 그려낼수 있다. 남편은 내가 등장하여 웃고 떠들고 있을때, 내 직업이 모델쯤 되는것으로 상상을 하고 있었단다. 읽고계시는 분들은 오해하지 마시길, 모델이라는 이미지는 이미 맛이 간 눈을 달고 있던 남자의 입에서 나온 단어이니까.
진한 화장, 금발 머리, 화려한 웃음, 당당한 눈빛, 섬뜩한 지성........
우리가 처음 만난 날, 난 남편을 그렇게 보내버렸다.
실제로는 그 당시 나는 한마디로 죽을 쑤고 있는 비참한 상황이였다. 현실도피를 위하여 외국으로 탈출을 하고싶은데 비행기값은 고사하고 여권만들 돈도 없는 비참한 밥벌레 실업자.
그런 인간이 밥빌어 먹고 무엇을 하겠는가. 정성껏 화장하고 꾸미고 나가서 울화통터지는 현실을 잊기위해 웃고 떠들수밖에. 과장된 교만으로 안간힘을 써서 자기 위로를 해줄수밖에.
그렇게 만나 연애를 하게 되었는데,
처음 1년정도는 나는 '모델'의 이미지를 고수할수 있었다. 시간을 많았기 때문이다. 일이 풀리기 시작하면서 모델의 이미지 박살에 걸리는 시간은 채 한달이 안걸렸다.
직업의 특성상, 콘택을 할수 없으니 안경을 써야했고, 화장을 전혀 할수가 없었고 머리, 옷, 신발, 완전 세트로 '포기'해야 했으니까. 눈가의 주름에 울적해지는 서른을 그 꼬라지로 넘겼다.
남편은 아직도 때때로 나의 외모에 대한 '사기행각' 에 속이 터지는 모양이다. 어쩌다 화장을 제대로 하고 뾰족구두를 신으면, 반가움과 지난시절에 대한 안타까움을 감추지를 못한다.
은근히 전해지는 남편의 바램.
내가 집 안에서 뒹글면서도 좀 꾸미고 우아하게 있어주기를.
나는 너의 애인이 되는것을 그만 두기로 했어, 라고 남편에게 선언을 해버렸더니, 남편이 묻는다. 그럼, 뭐가 되기로 했니? 마누라?
아니, 섹스를 할수있는 베스트 프랜드가 되어줄깨.
남편은 웃었다.
진짜로 그럴 작정인데.
남편을 놓아주려고 한다.
남편의 마음이 가는곳으로 당신, 부드럽게 갈수 있도록.
남편에게 징징거리기도 싫고, 남편의 인생을 쥐고있기도 싫다.
못생긴 베스트 프랜드.
내 껍데기를 벗겨준 시간이 우리 좋은 친구들의 따로 또 같이 가는 인생을 얼마나 엉켜놓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