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글은 내게 음식처럼 소화가 잘 되어 포만감을 주는 것이 있는가 하면, 목구멍의 가시로 걸려 내내 숨통을 틀어막기도 한다. 그런 가시를 삼킨 날이면 하루건 이틀이건 내내 생각을 쫓아다니며 정상적인 사고를 방해한다.
이불을 덮고 누웠는데 다시 그 글귀가 떠올랐다.
모든 것은 변해버린다는 진리.
그런데 갑자기 의문이 생겼다.
'변한다는 것이 그렇게 나쁜 것인가? 절망의 이유가 되는 것인가?
어제와는 다른 오늘, 오늘과는 다른 내일을 꿈꾸며 사는 것이 바로 인생이 아닌가?
오늘과 똑같은 내일을 꿈꾼다면 왜 숨쉬며 살아가는 것인가?
그저 내가 먹은 밥그릇 수를 좀 더 보태기 위해?'
갑자기 웃음이 났다.
인생을 온통 회색 빛으로 만들어버렸던 변한다는 의미하나가 전혀 다른 빛으로 다가왔다.
사랑이 변한다고 슬퍼할 일인가? 사랑은 변한다. 아니 사람은 변한다.
처음 만나면 서로 잘 보이기 위해 감출 것은 감추고 포장할 것은 포장하고,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편안함으로 변해 그 사람 앞에선 자연스러워진다.
점점 거짓이 없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슬퍼할 일인가?
10대에 생각했던 사랑, 20대에 생각했던 사랑, 그리고 30대에 생각했던 사랑.
사랑은 모습이 바뀐다. 아니 그에 대한 내 생각이 바뀐다.
금방 숨이 멎을 것만 같은 느낌이 아니면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헤어져도 영영 잊지 못하고 다시는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어야만 사랑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난 빨리 스물 여덟이 되고 싶어라고 말한 친구가 있었다. 꿈 많은 열 여섯의 나이에.
젊음의 열정이 주는 그 불안함을 평온함으로 맞고 싶다는 그 애의 말이 내내 이해가 안 되었었다.
하지만 스물 여덟도 훌쩍 넘겨버린 지금 이제야 난 그 말의 의미를 느낀다.
사물을 보는 눈이 한층 여유로와진 지금 보는 사랑은?
세월의 흐름처럼 사랑도 나이를 먹는 것일까? 사랑이 늙는 것이라고 생각지는 않는다.
그건 너무 삶을 허무하게 만들어버리는 단어다.
사랑은 나이만큼 성숙해지는 것이다.
사춘기 시절의 감성을 앞세운 무모함이 상대에 대한 배려로 바뀌어 가는 것이다.
남녀간의 사랑만이 세상살이의 전부인 줄 알았던 어린아이가 더 넓은 사랑을 하나하나 배워 가게 하는 게 바로 시간이다.
생각해보면 참 많이도 변했다.
사랑하는 사람의 전부이길 바라는 마음은 그의 모든 것을 알고싶어 하고, 그것이 당연한 권리이며 그의 전부이길 바란다.
하지만 어떤 형태로든 그렇지 않음을 발견하고는 또 좌절에 빠진다.
그래서 사랑은 새로운 생명에게로 전이된다.
새로운 생명에게 거는 새로운 기대.
하나하나 다시 만들어 갈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지며 그러한 착각 역시 오래가지 않는다. 그러면서 내맘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나말고는 아무도 없다는 서글픈 진리에 도달한다. 그리고 사람은 변한다. 역시 사랑도 변한다.
상처받고 싶지 않으니 위험을 피해가고 안전한 길을 택하며 사랑을 깨지 않는 방법을 터득한다.
즉 한 발치 물러서서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기는 것이다.
저녁을 먹는데 그가 갑자기 돼지고기를 상추쌈을 싸서 입에 넣어주었다.
"왜 아빠는 엄마 먹여주는데?"
"엄마는 애기니까."
우스개 소리로 넘긴다. 채 넘어가기도 전에 또 쌈을 넣어준다.
"왜 또 아빠가 먹여주는데?"
"아빠가 엄마를 사랑하니까 그렇지."
이렇게 말하는 내 가슴위로 뭉클한 무언가가 지나간다.
차근차근 기억을 떠올려봐도 이런 일은 처음이라 참 오래 살고 볼 일이다.
그렇다. 20대엔 하루종일 붙어있다 또 한 시간씩 전화를 해도 할말이 많았던 사랑이 30대엔 덮을 것은 덮어주고 챙길 것은 챙겨주는 사랑으로 변했다.
열정으로 불태우는 육체의 열기가 점점 사그라든다 해서 사랑이 죽는 것인가?
아니 사랑은 모습이 바뀌어 그 넓이를 더해갈 뿐이다.
결혼하는 순간부터 다른 사람에게 눈도 돌리지 않는게 당연한 진리로 생각했던 내가 아무 문제도 없는 부부사이인데도 다른 사람에게 호감을 느낄 수 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아버린 지금 세상은 무척 달라 보인다.
하지만 사랑이 변하지 않는다면, 모든 세상의 존재들이 변하지 않는다면?
삶은 참 단조로울 것이다.
오랜 세월 여자들을 울렸던 일부다처제의 비극도 여러 모습의 불륜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니 말이다.
아마도 신문지면을 채울 일이 절반으로 줄어들지 않을까?
짝사랑을 시작한 사람은 영원히 짝사랑을 할 것이고......
또한 10대의 불끈불끈 솟는 정열과 감성으로 평생을 산다면?
그래서 하느님은 위대하신가 보다.
변화란게 없으면 금세 인간들은 삶에 싫증을 느끼고 삶을 스스로 포기하거나 나태해질 거란 걸 예감하셨으니까
나만해도 그렇다.
어제와 오늘이 똑같다면 내일을 기다리지도 더 살고 싶지도 않을 것이다.
전혀 예견하지 못했던 상추쌈의 행복이 기다릴 줄 모르고 살다가 만나는 행복이 있기에 삶은 더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닌가?
다만 그런 변화도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의 변화가 아닌 더 못한 내일이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할 것 같다.
그러기에 옛 성현들은 나이가 들면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한다고 하신 것이다.
얼굴은 바로 자신이 살아온 모습을 담는 그릇이니까
보다 나은 내일로의 변화를 가꾸어 나갈 것인가?
아님 변화를 서글퍼하며 그냥 주저앉을 것인가?
더 비참한 내일을 만들어갈 것인가?
그 모든 것이 자신의 손에 달려있음을 다시 한 번 떠올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