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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26) -- 모국어


BY ps 2003-03-01


주중에 모자랐던 잠을 보충하느라 침대에서 비몽사몽하고 있던 토요일 아침,
왠지 바깥이 소란스러워 귀를 기울이니, 순이가 8살 난 큰딸과 승강이를 하고 있었다.

"빨리 준비해야 학교 가지!"
"I am not going!"
"왜?"
"Because..."
"왜 싫어?"
"Beause.. I don't want to!"
"너, 한국사람이니까 한글을 배워야지!"
"No. I don't want to learn Korean!"

L.A.에는 이곳에 이민 온 사람들의 자녀에게, 바쁜 부모들을 대신해
한글을 가르치는 학교가 여러군데 있다.
교회등 종교단체에서 무료로 하는 곳도 있고,
자원봉사하는 사람들이 주축이 되어 실비로 아이들을 가르치는 학교도
이곳 동포들이 많이 모여 살고있는 동네에 여러곳이 있다.

우리집에서 약 20분 정도 운전을 하고 가면 있는 동네에도
토요일마다 세시간씩 한글읽기와 쓰기, 태권도, 한국문화 익히기 등을 가르치는
한국학교가 있어서, 1년 반 전부터 큰딸을 매주 보내고 있었는데,
그동안 잘 다니면서 가끔 배운 '한글솜씨'로 우리를 흐뭇하게 하던 녀석이
갑자기 가기 싫다고 하는 거였다.

한참 녀석을 달래던 순이가 힘에 겨운지 나에게 원조의 손을 뻗어왔다.
"자기가 한번 해봐!"

그러나, 나의 어떤 노력도, 무슨 까닭에 굳게 마음을 먹었는지, 도무지 통하지 않았고,
결국은 나도 모르게 화가 나서 부모의 마지막(?) 무기인 협박의 회초리를 들었다.

"너, 아빠가 더 화내기 전에 학교 갈래?
아니면, 아빠한테 매 맞고 집에 있을래?"

그런데,
아빠의 화난 모습에 눈물을 글썽이며 빤히 올려다 보던 녀석이
눈물을 한방울 뚝 떨어트리며 돌아서더니 궁둥이를 뒤로 내밀었다.

허,허,허.....


결국은 어쩌지 못하고 그 후로 한글학교 다니던 것을 접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한국에서 미국방문을 왔던 친척중의 한분이 큰딸의 어색한(?) '한국말 투'가 귀여워
몇마디 하신 게 마음의 상처가 됐던 거였다.
녀석의 한국말 솜씨를 우리는 항상 칭찬해왔기에 제딴에는 잘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남의 눈엔 귀여운 웃음거리로 보인 게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던 모양이었다.

그일 이후로 우리 부부는 남의 집에 놀러갔을 때 그집 아이들의 한국말 솜씨에
그저 칭찬의 말 몇마디 외에는 함구를 한다.


***

그런던 딸이,
초등학교 5학년 때, '교환학생'으로 한국의 친구집에 일주일 간 다녀온 후로
'한국'에 흥미를 느껴 열심이더니,
요즘엔 (작년에 대학 졸업)
제 엄마와 자연스럽게 한국말로 대화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