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과 함께 차를 타고 휴대폰을 수리하고 쇼핑할 일이 있었다.
좌회전-우회전을 하라고 아들에게 말했더니
다음 블럭에서 8차선 횡단보도를 건너가는게 빠르다고 한다.
"내가 너라면 엄마 말대로 하겠다"고 했다.
아들은 횡단보도를 건너가는데 단 1분이면되고
엄마가 가자는대로 가면 차가 다시 u턴을 해야하는데
거리가 멀고 비합리적이니 엄마가 걸어가는게 낫다고 한다.
짐짓 옳은 말인줄을 너무 잘 알고 있었으나
"효자는 하늘이 낸다고 했다" 내가 어찌 가르치겠느냐는
가벼운 탄식을 하며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아들은 '왜 졸지에 불효자를 만드느냐'고 차를 돌려 엄마가
말한대로 삼성 서비스 센터 앞에 세웠다.
내 뜻대로 아들이 해 주었지만 기분은 엉망으로 망가져서
아들의 수고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고 아들도 본심이 아님을
전하고 싶어하는 마음을 헤아리며 썰렁한채 씁쓸했다.
이런 비슷한 일로 아들과 종종 충돌을 한다.
아들은 합리성을 주장하고 엄마는 합리성을 뛰어넘는 천륜과
효심을 강요하는 안쓰러운 장면이다.
이제 아들과 대화가 되고 둘이 즐겁에 소통되는 날이 올려면
언제쯤일까? 엄마가 더 약해지면 효심이 더 성숙하겠지.
엄마가 아들과 헤어질 날이 더 가까워오면 아들을 위해서
더 많이 양보하고 가르치려는 억지를 부리지 않겠지.
아직은 티격태격 싸우는것이 힘이 있다는 증거겠지 라고
위로하고 말았다.
하지만 아직도 양보할 수 없는 것 한가지.
합리적일때만 승복하겠다면 비합리적일때는 불복 하겠다는
단순한 논리 아닌가?
엄마가 자식을 키울때 합리적이어서 키웠나?
비합리적일 대는 포기해도 되는가?
합리성이라는게 무엇인가? 이치에 맞고 모두에게 더 효용성을
높힌다는 것인가? 부모자식간에 이치와 효용성 이상의
흐르는 뜨거운 핏줄의 정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이치에 맞지 않고 때로 효용성도 없는 듯한 희생의 날들을
통해 우리 가정이 여기까지 지켜왔다면 그것을 알아차릴 수 있는가?
거룩한 낭비. 무모한듯한 희생. 어리석은 듯한 끈끈한 정
때문에 자신이 오늘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
효심을 가르쳐서라도 효도 받고싶은 에미의 심정을 아들은
언제쯤 알게될까?
내 아버지께서 늘 말씀하셨다.
아버지 앞에 올때 돈을 꾸어서라도 먹을 것을 꼭 사오너라
그때는 이해가 안되었다.
그꾼돈을 아버지가 갚아 주셔야 할텐데...? 얼마나 비합리적이고
고리타분한 이론인가? 간식도 일체 안하시는 아버지가 이해가
안되었다. 내가 똑같은 비합리적인 요구를 하고 있지 않은가?
단지 '부모' 라는 가정의 질서와 권위를 유지하는 것이
삶의 기본 틀이요. 그 관계를 순종이라는 촉매로 버티어
낼 수 있음을 체득시키는 과정에서 조심스러운 것은
혹시 자녀를 노엽게 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