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엄마, 이거....”
“왜 이래? 언니. 너무 부담스러워.”
“고마워서 그래. 이따가 카드 읽어봐.”
더 말할 틈을 주지 않고 언니가 문을 닫으며 나가버리자, 따라 나가던 찬바람이 되돌아온다. 두고 간 주황색 비닐 속에 큼지막한 사과 대여섯 개와 스티로폼 용기에 포장 된 딸기가 들어 있다. ‘아식스’ 로고가 박힌 흰색과 연하늘색 면양말 두개씩이 든 하얀 종이 가방엔 자그마한 분홍색 봉투도 있다.
‘늘 따뜻한 마음을 전해주는 정다운 이웃’으로 시작하는 언니의 깨알같은 글씨로 채운 카드에 빨간 장미 세 송이가 부끄럽게 웃고 있다.
빚지고 못사는 언니의 평소 성격을 알면서도 고마운 마음보다 부담스럽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선물의 의미가 불순하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무얼 그리 고마운 일을 했는가 하는 생각 때문이다.
우리가 이웃해 살기 시작한 것은 다섯 해 전이다.
이름의 느낌도 뭔가 연관된 느낌이 드는 ‘현제’와 ‘미래’가 같은 반이고, 둘이 친하기도 하려니와, 비슷한 면들이 있어 서로 친해졌다.
횟집과 식당, 수산물 판매점이 한 줄로 늘어선 부둣가에서 식당을 하는 언니나 뱃머리에서 담배 집을 하는 나나 늘 바쁜 까닭에 달리 어디 가서 친구를 만나고 사귈만한 시간이 없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우린 친구고, 언니고, 동생이고, 다 한꺼번에 해결하고 살아가는 법을 익혔다고나 할까. 회 떠놨다고 모이고, 멸치볶음 맛있다고 모이고, 시시때때로 모여서 아이들 이야기를 하고, 동네에 떠도는 소문을 안주로 가끔 술도 마신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어른들은 어른들대로 서로 위안이 되어 주며 살아간다.
그런대도 굳이 언니가 나에게 내가 부담스러워할 만큼의 선물을 주는 것은, 뜨개질 잘하고
음식 잘하는 언니와 달리, 내가 아이들처럼 놀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어린이 집도 다니지 않는 연년생인 두 꼬마들과 어울려 놀다 보니, 나도 아이가 되버렸기
때문이다. 눈이 오면 동네의 아이들과 썰매 타러 가고, 크리스마스엔 동네 사람들 다 초대해서 ‘가족파티’를 하는 것은 언니의 표현처럼 따뜻한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내가 그 일을 즐기기는 사람이란 걸 몰라서 하는 얘기다.
도저히 잠들 수 없을 만큼 더운 여름 날, 동네 애들 다 데리고 가서 밤 해수욕을 하고 불꽃놀이를 하는 것은, 그런 일들은 사람이 많을수록 더 재미있고, 아이들의 그 들뜬 얼굴과 웃음에 내가 행복해 지기 때문이다.
내가 좋아하는 이 놀이들에 같이하기를 내 이웃들은 마다하지 않는다.
특별 이벤트는 한 해에 몇 번 되지 않는데도 마치 일년 내내 그러고 사는 듯한 착각을 하며 살아간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미래엄마 덕에 즐거웠어.”하는 공치사까지 듣는다.
정작 즐거웠던 것은 나인데도 말이다.
몇 밤을 새워 떴을 조끼나, 맛있는 감자탕 냄비를 받으면서도, 놀러온 아이들에게 책을 권해 주거나, 내 아이들에게 하듯이 몇 가지 가르쳐 주는 일을 빼고는 난 아무것도 줄게 없다.
더구나, 이렇게 마음 담긴 예쁜 카드에 선물까지 받으면 나는 더욱 부끄럽다. 언니의 말처럼 ‘따뜻한 이웃’임에는 틀림없다. 그리고 그 마음들을 나누는 것은 내가 아니라 모두 그렇다는 말이다. 우리는 이렇게 서로의 빈 곳을 채워주기를 아끼지 않는다.
때론 김치보시기에 담겨 때론 감자알들과 섞여 마음들이 오간다.
늘 주면서도 받는 게 더 많다 생각하고, 식구들 먹을 반찬까지 퍼 주면서도 더 줄게 없나 생각한다.
누가 주고 누가 받는가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모두다 바닷바람 차가운 이 마을에서 살아가기가 즐겁다는 사실이다.
날 어두워지면 더 썰렁해지는 이 마을이 따뜻한 것은 이런 이웃들의 집들이 어깨를 부비고 있기 때문이다. 바람가득 실려 오는 생선 비린내가 향기롭기조차 한 것은 아름다운 향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살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한겨울 딸기에 환호를 한다.
눈에 보이는 듯 하다. 딸기를 사 놓고도 뭔가 더 주고 싶어, 또 사과를 사고 그래도 부족한 것 같아 양말까지 샀을 것이다. 자기는 마트에서 천 원짜리 양말 사면서, 날 위해서는 ‘아식스’ 양말을 샀을 것이다.
카드의 글을 읽으며, 난 또 뭘 줄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