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 베란다 밑으로 아이비를 몇 개 심어 두었다. 시꺼먼 흙이 벌거벗은 채 있는 것도, 잡초가 여기저기 솟아 있는 것도 흉해 보여 흙도 가리고 담벼락을 타고 운치도 더해 주었으면 하는 바램에서다.
지리한 장마에 오히려 제 세상을 만난 듯 싱싱하게 솟아나고 벗어나는 잡초와 아이비가 서로 뒤 섞여 생존경쟁이 치열해 보인다.
잡초에게 조금 미안한 마음도 들지만 뒷 베란다 밑으로는 아이비가 덮이기를 바라느 나는 아이비 편을 들어 잡초를 뽑기 시작했다.
오가는 사람들의 눈에 내가 하는 짓이 흥미있어 보이는 모양이다. 나물을 캐느냐고 묻기도 하고 농사를 지었느냐고 묻기도 한다. 좀더 강한 흥미를 느끼는 사람은 다가와 아이비를 가리키며 무엇이냐고 묻기도 한다.
나는 왜 아파트 뜰을 가꿀까?
'삭막함이 싫어서?' 이런 생각을 하면서 가슴이 답답해지며 눈에 눈물이 고인다. 조롱에 갇힌 새와 어항에 갇힌 물고기를 연상시키는 내 삶이 안타까움인가 보다.
'그저 풀과 나무가 좋아서?' 이런 생각도 해 본다. 눈에 눈물이 고이는 대신 가슴 속에 조그만 기쁨이 솟아 나는 것을 느낀다. 겨울에 이사와서 봄부터 가꾼 뜰이지만 관목과 풀꽃들이 어우러져 제법 오는 이 가는 이의 눈길을 끌어 당긴다. 소문 듣고 찾아오는 이가 어쩌다 있기도 하고.
'그래 나는 풀과 나무를 좋아하지.' 그것들을 위해서라면 복더위 한 나절을 땀으로 절어도 좋다고 생각할 만큼.
나이 든 미국여자들은 자기 나이를 서른 아홉이라고 하는 농담이 유행이란다. 이유는 마흔부터는 중년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라고.
마흔을 넘기고 해를 거듭하게 되면서 그 의미를 점점 잘 이해하게 되었다. 인생의 내리막길에 접어 들었음도 느끼고 이러다 어느 날 죽음을 맞겠구나하는 생각도 가끔 한다.
'산다는 게 뭘까?' 개똥철학을 하면서 세상을 바라보니 콘크리트와 아스팔트와 매연에 갇힌 내 모습, 중년이라는 나이를 넘기고도 이곳저곳 방황하며 뿌리내리지 못하고 매년 이삿짐을 꾸리는 신세가 싫었다.
그래 일년 만 살 곳이면 어떠랴? 내일 이사해야 한다고 해도 풀과 나무를 심고 가꾸자. 누군가 이 풀과 나무를 보며 마음 속의 삭막함이 조금이나마 덜어진다면 내 삶의 의미는 그것에 두자.
그래서 쉰을 바라보는 아줌마가 반찬 살 돈으로 풀꽃을 사다 심었다. 그래서 아줌마가 중복 날 한 나절 내내 땀에 절어 아파트 뒷 뜰의 잡초를 뽑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