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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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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남편


BY ooyyssa 2003-01-13


남편의 코고는 소리가 작은 한지문을 흔들고 있다.
갈바람이 불면 고기가 잘 안잡힌다고, 오늘따라 게으름을 피우며
누워 있다.
어제 밤이 늦도록 컴퓨터 앞에 앉아 바둑을 두고 있는 것 같더니....

내 남편은 미술을 전공했고,교사자격증도 있다.
주변에선 붓대신에 낚시대를 잡은 그를 아까워했다.
미술학원이라도 하나 차려라고 하는 말을 들으면, 남편은 웃기만 한다.
딸아이에게 그림이라도 좀 가르치라고 하면 ' 때가 되면 가르쳐
주지'하며 또 웃는다.
미술을 전공한 아빠를 둔 딸, 자기도 잘 그릴거라는 막연한 믿음이
있다.
작은 마을에서 그의 능력은 꽤 유용하게 쓰인다.
소방서 담벼락에 벽화를 그리기도 하고, 딸의 교실에 페인트 칠을
하기도 하고, 월드컵 때는 아이들 얼굴에 '페이스페인팅'을 도맡아하기도 했다.

미술선생님의 사모님이 될뻔한 나는 이제 뱃사람의 각시가 되었고,
우리 집은 화구대신에 낚시와 낚시줄만 널어져 있다.

딸애 학원 숙제로 가족의 전기문을 써 오라한다.
아빠에게 인터뷰한다.
"태어난 곳은?" "가파도"
"자란 곳은?" "모슬포"
.........
내 남편의 꿈이 뭐였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에 남편은 삶을 꽤 재미있게 꾸려 가는 사람이다.

날씨 좋은 날은 가족의 생계를 위해 배를 타고 나가지만,
그것도 반은 놀이같고, 이것저것 지출수입 목록에 관한 얘기는 그저 듣기만 한다.
남편은 바다에 가는 날보다 못 가는 날이 더 바쁘다.
어떤 날은 흙묻은 감자를 갖고 오기도 하고, 봄이면 고사리를 꺽어오기도 하고, 수확이 끝난 밭에서 양파를 주워 오기도 한다.
산딸기를 따다 술을 담아 나눠 먹기도 하고, 아이들 데리고 오디
따러 다니기도 한다.
동네 축구회에도 그가 없으면 체육대회를 못 치르고, 청년회 일로도 바쁘다.
또한 불자동차 소리에 민감한 의용소방대원이기도 하다.

저녁을 먹고나면, 나갔다가 들어오는 길 옆구리에는 비디오테입
아니면 무협지가 꼭 끼어져 있다.
그게 없는 날이면 엊저녁처럼 바둑을 둔다.

나랑도 놀아주라고 투정을 부리면,
내 남편 하는 말
"기다려라. 늙어서 게이트볼 치러갈 때 손잡고 다니자." 한다.
상상이 간다.
호호백발 되서 하얀 츄리닝에 머리에 스카프를 두르고 흰 운동화
신고....
그런데 그 사람 아마 늙어지면 노인회 일로 바쁠걸?

내 남편은 내가 자기를 따라다녔다고 극구 주장한다.
사실이다. 그런 순수함과 욕심 없는 그가 좋았다.
눈이 감겨져 버리는 그의 밝은 웃음이 좋았다.
그리고 지금도 그 웃음이 좋다.
그에 비하면 현실주의자인 나의 잔소리에 말없이 활짝 웃어버리면 나는 모든 전의를 상실한다.

그가 지금 코를 골며 컴퓨터 옆에서 자고 있다.
남편을 깨우는 일은 정말 어렵다.
"응, 일어날께" 하곤 돌아눕고, 또 깨우면 "안마해 줘"하며
조금이라도 더 잘려고 꾀를 피우는 남편은 다섯살 내 아들 수준이다.
두고 싶지만 깨워야겠다.
낭만주의자인 남편도 현실주의자인 나도
할 일은 해야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