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마신 술을 해독하느라 하루 종일 먹어댄다.
발목도 욱신 거리는 게 아무래도 무리했나 보다.
몸도 속도 별로 좋지않지만, 기분은 좋다.
조카 아이의 고등학교 진학시험이 끝났다고, 그것도 놀라운- 본인은 너무 안나와서 놀라고, 주변인들은 대단하다고 놀라는-성적을
거두었고,해도 그믈어가니 모여서 망년회나 하자고 친정으로
오라했다.
친정, 나에게 친정 가는 날은 일년에 하루정도이다.
바쁘다는 핑계로 친정가기를 꺼려하는 건 다 이유가 있다.
말이 친정이지 어머니도 오빠도 없이, 올케 언니와 조카 아이들만
있는 집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올케언니를 보면 죄책감 비슷한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어려운 일 다 맡겨 놓고 혼자 빠져나 온 것같은 기분.
"고모 안 오면 망년회는 없던 걸로 하고....."
올케 언니의 말에 도저히 빠져 나갈 수가 없었다.
딱히 못 갈 이유도 없고.
집안 일을 대충 마무리하고, 아이들도 남편에게 다 맡기고 홀로
친정 나들이에 나섰다.
다 자라버린 조카들과 이제 마흔이 넘은 올케 언니.
스물 셋인가에 시집와서 이십년을 넘게 사니, 이제 나보다
더 우리 집안 사람같다.
"어떻게 언니같은 엄마에 저런 똑똑한 아들이 나왔을까?"
나의 농담을 기분 좋게 받아 넘긴다.
사촌형제들 부부까지 합세해 꽤 대가족 모임이 되었다.
아무래도 느긋해지는 마음이 드는 걸 보니 친정은 친정이다.
윤도현 밴드의 노래를 멋지게 부르는 조카는 음치인 제 아빠를
안 닮았나?
너무 멋지고 대견하다.
이렇듯 잘 자라 준 것에 고모로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등 토닥이며
자랑스러워 하는 일뿐이다.
새벽 세시 반.
삼십분 거리를 택시를 타고 돌아온다.
부득부득 택시비까지 지불하고 돌아서는 올케언니의 술 오른
발그레한 볼이 내 가슴을 뜨겁게 한다.
'언니. 늘 고마워요. 그 자리에서 단단히 뿌리내려 줘서.
그리고 조카들아 고맙다.
어느새 너희들이 내 배경이 되어가는구나.'
조카 덕에 허허로웠던 내 마음 밑둥에 따뜻한 무엇이 차오름을
느낀다.
택시기사 아저씨가 실내등을 끄자 잠인지, 술인지에 취한
나는 잠깐 깨어 주위를 둘러 본다.
'대정 20km' 이정표가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