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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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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눨 잘못한 것 같다.


BY ns... 2002-12-23

아버지가 울며 내게 말했다.
“나도 사람들이 보통 고집이 센 사람이 아니라고 하는데 너에겐 손발 다 들었다. 나는 네가 딸이고 네 동생이 아들이라고 차별한 것 같지 않은데 네가 그렇다고 하니 인정하고 앞으로 그러지 않도록 하겠다. 제발 이제, 동생하고 그만 싸워라.”
아무도 몰래 맛있는 음식을 동생에게 먹이고 싶어하는 어머니에게 동생이 말했다고 한다.
“엄마, 누나가 알면 어떡하려고 이래요. 이러지 마세요.”
나랑 한 반에서 공부하던, 내게 오빠가 되는 동갑내기 사촌은 툭하면 나로부터 이런 소리를 들어야 했다.
“네가 남자라서 나보다 잘 난 게 뭐가 있어? 너 나보다 공부 잘 해?”
아들과 딸을 차별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아프게 하기 위해 모질고 독한 말도 서슴지 않았다.
“난 이 다음에 시집가서 딸을 낳으면 그 자리에서 엎어 죽일 거야.”라고…

그랬다.
남녀차별은 내가 살면서 극복하고 풀어야 할 커다란 숙제였다.
그 문제는 나를 아프게 할 때가 많았다.
분노하고 원망하고 좌절하게 할 때가 많았다.
내 주변의 누구도 내 적이 될 수 있었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언니도, 동생도, 남편도, 시부모도, 동네 어른들도, …
난 내가 여자로 태어난 것이 싫었다.
살면서 여자다운 요소를 내 삶에서 배제하려고 애쓰기도 하였다.
치마를 입는 것도 굽 높은 구두를 신는 것도 화장을 하는 것도 액세서리를 하는 것도 가급적 피했다.

남녀차별 문제에 부딪치면 날 잘 훈련된 투사처럼 싸웠다.
울 어머니 아버진 두 손 번쩍 들고 항복을 선언했고 고개를 설설 저었다.
신혼 초에는 툭하면 ‘여자가…’라는 말로 기선을 제압하려 들던 남편은 나랑 이 십년을 살고 난 지금 공공연히 말한다.
여자가 여러 면에서 남자보다 우수하다고, 남자는 그저 여자 말을 잘 들어야 한다고…
울 아들은 아들과 딸을 차별하는 친구 집에 다녀와 흉을 본다.
요즘 세상에도 그런 이상한 집이 있다고…

그런데 내가 그다지 잘 한 것 같지 않은 생각이 요즈음 든다.
청소도 설거지도 잘 하는 아들과 달리 손 끝에 물도 묻히기 싫어하고 온통 멋 부리는 일에만 관심 있는 딸을 보며 내가 뭔가 잘못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남편 앞에 기세 당당한 내 모습도 좋아보이지 않는다.
내가 남편을 초라한 남자로 만드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에 때론 남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나는 이제 내가 싫어했던 여자다운 여자가 되고 싶어하는 것 같다.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고 겸손할 줄 아는 여자, 때로는 부당함을 알면서도 수용할 줄 아는 여자, 다소곳하고 참을성 많은 여자가…
여자라는 굴레를 벗고 싶어 안달하며 살아왔는데, 그래서 벗어버린 것 같기도 한데, 그 굴레를 쓰고 살았더면 더 좋았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겸손과 헌신과 인내를 배울 수 있는 여자라는 굴레가 내겐 참으로 필요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 굴레를 쓰고 살았더면 지금의 나보다 훨씬 성숙한 내가 되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운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