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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해마지막달에 문득 옛 선생님을 생각하며..


BY cok8821 2002-12-23

(펌)"선생님 손 참 따숩다"
나는 사회복지관에서 결손 가정의 아이들을 돌봐 주는
보육교사입니다.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아이들과 함께하다 보면 기쁜 일로
웃을 때도 많고 마음 아파 울 때도 많습니다.
고만고만한 또래의 아이들이라
엉겨 붙어 싸우는 경우도 많아, 혹 내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싸움이
나서 아이들이 다칠까 늘 걱정스럽습니다.
내가 돌봐 주는 아이들 중 오늘은
복열이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복열이는 초등학교 5학년인 남자아이입니다.
뇌신경 호르몬 물질 중엔 도파민이라는 게 있는데, 과다하게 분비될 경우 정서
불안 장애를 일으킨다고 합니다.
복열이가 바로 그런 아이입니다. 복열이는
정신과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데, 늘 정서가 불안해서 한곳에 집중하지
못하고 이리 갔다 저리 갔다 잠시도 가만 있지를 못합니다.
“복열아, 이리 와
앉아. 선생님이 재미있는 동화책 읽어 줄게.”라고 아이 손을 잡아끌어도 단
몇 분이 못 갑니다. 처음엔 내 손을 따라 동화책에 눈길을 주다가도 어느새
몸을 비비 꼬고 일어나고 싶어 안절부절못하니 덩달아 내 마음도 불안해지기
마련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잠시 바깥에 다녀온 사이 또 일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영현이가 바닥을 뒹굴며 자지러지게 울고 있는 것입니다. 영현이의
얼굴은 고통으로 잔뜩 일그러져 있었습니다.
“영현아, 왜 그러니? 응? 어딜
다친 거야?”
우는 아이를 겨우겨우 달래며 물었지요.

“복열이가……복열이가 그랬어요…… 선생님 너무 아파요, 복열이가 내 고추를 발로
걷어찼어요…….”
아프다고 떼굴떼굴 구르는 아이를 한참 동안 달래 겨우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전에도 복열이가 영현이 고추를 발로 차 버려서 호되게 혼을 낸
적이 있었지요.
그땐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약속했는데, 녀석이 이번에도
이런 일을 벌여 놓고는 겁이 나 도망가 버린 것입니다.
‘이 녀석, 이번엔
정말 눈물이 쏙 빠지게 혼을 내줄 테야.’
단단히 결심을 하고 복열이의
여동생인 은미를 앞세워 늦은 밤 복열이 할머니를 만나러 갔습니다. 말썽꾸러기
복열이가 유일하게 무서워한다는 할머니 말씀은 좀 들을까 해서요.
할머니를
만나 모든 걸 다 일러바칠 요량으로 씩씩하게 그 집을 찾았지요.
복열이네
집은 외등 하나 없는 듯 어스름한 골목길에 있는 어두운 지하실
방이었습니다. 문도 잠겨 있고 불도 꺼져 아무도 없는 적막감마저 드는 출입문 앞엔
주워다 쌓아 놓은 종이박스와 신문지 같은 폐휴지 더미가 창고처럼 어지럽게
놓여져 있었습니다.
“할머니 어디 가셨니?”하고 물어봐야 하는데 갑자기
말이 안 나왔습니다. 왜 그런지 목이 메어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아마도 복열이 할머니는 그 시간에도 누군가 내다 버린 종이 따위를 주우러
집을 나가셨겠지요.
은미의 손을 잡고 있던 나는 처참하게 무너지는 내 자신에
대해 할 말을 잊은 채 흐르는 눈물을 닦아 내기에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때
언제 왔는지 어둡고 찬 지하 계단 한쪽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말썽꾸러기
복열이의 작고 여윈 등판이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어린아이들을 그대로 두고
올 수가 없어 양손에 두 아이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자꾸만 눈물이
나왔습니다. 은미는 살짝 살짝 몰래 내 눈물을 훔쳐보곤 재불재불 떠들던
입놀림을 그만하고 고개만 떨군 채 “야, 선생님 손 참 따숩다,
따숩다…….”라고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습니다.
이 골목 저 골목 숨은 찬바람이 거칠게
불어 대던 그날 밤 내 눈물은 좀처럼 마르지 않았습니다. 내 설움에 내
부족함에 자꾸만 눈물이 더 나나 봅니다.
이 어린아이들이 짊어져야 할 짐이 이리
무거운데, 내 가슴으로 이 아이들의 아픔을 따스하게 보듬어 안기엔 그
넓이가 너무 작으니 한숨만 나올 뿐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행복한 가정에서 여유
있게 사는 날이 언제쯤 올까요?
-함께가는세상 1월호에서 퍼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