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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된 이름과 쾌락을 구하는 일이 아니길


BY baramandgurm 2002-12-13

헛된 이름과 쾌락을 구하는 일이 아니길 기도하면서


참으로 오랜만에 마음이 설레는 과분한 꿈을 꾸었습니다.
토네이도처럼 정신을 차릴 수 없는 격동의 시간을 지나오면서, 많이 참회하고 또 포기하고 체념하면서 제 자신에 대한 의심을 거둘 수가 없었습니다. 눈을 뜨면 찾아드는 두려움과 공포를 털어 내기에도 벅차, 기도를 잊은 지 오래입니다.

선지식들의 가르침은 공허했고, 산다는 것은 그 고유의 생명체가 그에게 주어진 인연만큼을 체감하며 지나야 하는 참으로 고독한 길이라는 걸 절감할 때마다, 제 삶이 혹여 누군가에게 짐이 될까 전전긍긍했습니다. 가야지. 그냥 가야지. 분별하지 말자. 이런 인연의 얼크러짐이 내가 아니다. 나를 찾아서 가야지. 산만해지면 안 된다. 때로 포기하고 또 때로 실낱 같은 빛을 발견하기도 하면서 도대체 산다는 게 무엇인가. 지금 여기에 나는 왜 있는가. 참으로 내가 있기는 있는가. 어느 날 아침은 삶이 꿈과 같고, 모든 것이 허망한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사십이 불혹이라는 말이 서글펐습니다.l 사십 줄에 들어 느닷없이 짊어지게 된 생활고에다, 미숙한 직장 생활에서 그들이 요구하는 의도와는 사뭇 어긋나는 자신의 미혹함이 더욱 누추해지고, 지금 내 움직임의 목적이 부귀 영화나 명예와 권력, 혹은 드러나고자 하는 욕심에 있지 않고 오직 생존일 뿐이니, 혹 그것이 불혹은 아닐까. 나름대로는 바르고 정직 하려고 노력하니 그것이 불혹인가. 그러다가 도대체 바르다는 것은 무엇이고 정직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다시 의심이 일곤 했습니다. 대성인의 길은 저와 같은 범인이 어찌 어림짐작이나 하겠습니까?.

슈바이처가 보았다는 저 아프리카의 무더운 창가에 불을 보고 달려드는 곤충 떼. 그가 말했더군요. "나는 단지 살려고 몸부림치는 생명체에 둘러싸인 살려고 몸부림치는 한 생명체에 불과하다"라고.
그랬습니다. 온 누리가 다, 몸부림치는 생명체뿐 아니라 존재와 비존재를 막론하고 모두가 다, 저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들로 여겨집니다. 길가의 먼지와 저 하늘의 무한한 허공, 혹은 중생대의 공룡이나 보이지 않는 세균까지도 우리는 늘 함께 해 온 한 몸뚱이라는 생각이 문득 일기도 합니다. 그러할 때, 아주 잠깐씩은 자유를 느낍니다. 아니 그러기 위해 애썼지요.

그러나 미혹의 어둠을 끝내 헤치지 못하고 저는 거미줄에 걸린 나비처럼 퍼덕거리면서 그럴수록 옥죄여오는 부자유한 인연의 그물을 망연히 지켜봐야만 했습니다. 제가 일을 하는 가게의 주인과는 인연이 다 한 듯 했습니다. 자꾸 의견이 어긋나고 정서가 불안해진 저는 실수가 빈번해졌습니다. 나를 버리겠다. 나를 버리는 공부이려니 자신을 다잡았지만 기실 저는 누구보다 자신에게 더욱 지쳐가고 있었습니다.

그러할 때, 우연히 저는 한 사찰을 찾게 되었고, 그 곳에서 스님 한 분을 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 분께서 정신이 번쩍 드는 법문을 들려 주셨다던가, 아주 특별한 기운을 느꼈다던가, 그런 드라마틱한 일은 없었습니다. 다만, 산사의 적요와 새 소리, 바람 소리, 거기다 그야말로 무미 건조한 차 한잔을 대접받았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왠지 모르게 저는 마음이 차분해져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불서들을 꺼내어 읽기 시작했습니다. 아마 그것이 저의 초발심이 아닌가 합니다. 공허하던 낱말들이 말씀으로 들리기 시작했으니까요. 지금이 바로 그때인가. 저는 이제는 참구해야 할 무엇을, 적어도 어떤 목적을 찾았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침 절에서 일 할 사람이 필요하다기에 저는 일말의 망설임도 의심도 없이 자원을 했습니다. 그 인연의 시간이 길고 짧음에는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것이 생활의 수단이 되지 못할 것이라는 둘레의 만류도 뿌리쳤습니다. 그저 축복으로 받아들여 일터에 사표를 냈지요.

도반인 백연지 보살이 17년 전에 제게 보시한 책 한 권이 있었어요. 대주 혜혜 선사의 '돈오입도요문론' 부제는 성철 스님 법어집으로 되어있습니다.
그 책을 받았을 때는 제가 이십대였고, 욕망으로 불타는 철없는 아이였지요. 그 책의 한 구절도 읽을 수 없었습니다. 그저 소중한 책이려니 내용도 모르면서 이사를 할 때마다 버리지 않고 꾸리고 다녔을 뿐입니다. 며칠 전부터 그 책을 펴 보았습니다.
잘 알고 계시겠지만 조금 옮겨 적겠습니다.
"이 돈오의 문은 어디로 들어갑니까?"
"단 바라밀로 들어가느니라."
"어떤 인연으로 단 바라밀이라고 합니까?"
"단이란 보시를 말하느니라."
"어떤 물건을 보시하는 것입니까?"
"보시는 두 가지 성품을 버리는 것이니라."
"어떤 것이 두 가지 성품입니까?"
선과 악의 성품을 버리는 것이며, 있음과 없음의 성품을 버리는 것이며, 사랑함과 미워함의 성품, 공과 공 아님의 성품, 정과 정 아님의 성품, 깨끗함과 깨끗하지 아니함의 성품을 버려서 일체 모든 것을 전부 보시하면 두 가지 성품이 공함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만약 두 가지 성품이 공함을 얻을 때에 또한 두 가지 성품이 공하다는 생각을 짓지 아니하며, 또 보시한다는 생각도 짓지 아니함이 곧 진실로 보시 바라밀을 실행하는 것이니, 만 가지 인연이 함께 끊어지고 비로소 일체처에 무심함이니 이경지가 곧 성불이라고 했습니다.

이 글이 혹여 공허한 말장난일까 두렵습니다. 책을 덮고 눈을 감았습니다. 요즈음 제가 마음을 설레이며 꿈꾸던 일, "절에 가서 용맹정진을 해야지. 이 생에서 반드시 미혹의 어둠을 거두고 말겠다."그렇게 다짐하며 인연의 시간인 줄 알고 기다리던 자신을 다시 들여다보니 본분과 의무는 뒤로 한 채, 절이니 속세니 분별을 하고 욕심을 내면서 또 다른 인연의 그물 속으로 휘말리고 말, 또 하나의 욕망 덩어리에 불과했습니다. 둘레의 만류도 그냥 뿌리칠 수만은 없는 당연한 우려일지 모릅니다.

잠을 못 이루고 뒤척이길 며칠 밤, 간밤에는 꿈을 꾸었습니다. 머리에서 하얀 비듬이 우수수 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해몽 책에 잘 풀리지 않던 일이 풀려나갈 꿈이라더군요. 풀릴 일이 있어야지. 도대체 뭐가 풀린다는 거야. 모든 것이 이렇게 뒤엉켰는데 아무 기대도 걸어 볼 수 없는 하루가 또 지났습니다.

그리고 퇴근 후에 한 통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압구정동에 있는 보석 회사에서 함께 일해 보자는 제안이었습니다. 지금의 일터보다는 조금 더 보수를 올려주고 종업원도 훨씬 많은 규모가 큰 회사라고 합니다. 저는 동요되었습니다. '열심히 사는 것, 그것이 곧 수행일지도 모른다. 묻지 않고 사는 것, 그것이 불혹일지 모른다.'그런 마음으로 저는 다시 한 번 삶을 꿈꾸게 된 겁니다.

이것이 제 인연의 흐름일까요? 저는 보석 회사에 쾌히 승낙했습니다. 이 선택이 헛된 이름과 쾌락을 구하는 일이 아니길, 이 한 생이 아니 온 듯 다녀가는 길이길 기도하면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