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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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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판 스케치


BY 고들빼기 2001-07-04

우리 집 현관 입구에는 작은 칠판이 하나 걸려 있다.
글씨 쓰기를 좋아하던 딸아이를 위해 장난감을 사주는 마음으로 사서 걸어둔 것이 벌써 5년이 넘었다.

싫증도 내지 않고 쉴새없이 글씨 쓰기 놀이를 하며 선생님 흉내를 곧잘 내던 딸 아이는 어느새 고등학교 3학년이 되었고 칠판은 딸아이의 소유물에서 벗어나 어느 때부터 인가 가족 모두에게 없어서는 안될 요긴한 물건이 되어 있다.

식구들이 드나드는 입구에서 하루에도 수없이 가족을 대하는 칠판의 모습은 사뭇 진지하기 까지 하다.

출입을 할 때마다 무심코 보게 되는 칠판의 표정에서 가족의 모습이 온갖 형태로 다가와 빙긋이 웃음을 짓게 한다.

가족이 모두 집에 있을 때 누군가 중요한 메모를 하면 또닥 거리는 분필의 그 청명한 소리에 또 무슨 희망적인 내용을 토해 낼까 에 관심이 쏠린다.

남편이 쓰는 분필의 소리는 언제나 생각이 가득하다.

그래서인지 8분의 6박자의 느린 소리가 난다.

언제나 그러듯이 남편은 영어 한마디를 적거나 국어 낱말을 적어 아이들을 불러 세운다.

다음에는 잔잔한 칭찬이 칠판의 미소로 번져 나간다.

또한 건망 보균자인 아내를 위해서 어느 날 무슨 일이 있을 거라는 내용을 기록하여 미리 인식하게 한다.

그런데 다른 메모 내용에 비해 조금은 딱딱하기도 한 남편의 칠판 사용법에 대해서는 의의를 제기하는 듯한 인상마져 풍긴다.

마치 공부를 하기 싫은 아이를 억지로 붙들어 놓고 시키는 것처럼 칠판도 무척 안쓰러워 보일 때 가 있다.

그럴 때면 내가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칠판은 위안을 얻는 표정인양 한가족의 구성원처럼 느껴진다

예기치 않은 일로 외출을 할 때면 엄마가 없는 텅 빈집에 돌아올 허전한 아이들을 위하여 행선지와 출발시각 돌아올 시각을 메모해 두기도 하고 무슨 간식이든 꼭 먹어줄 것을 당부하는 부탁을 하기도 하며 덧붙여 간단한 한마디를 적어 칠판은 집에 없을 엄마의 환영이라도 포근하게 전달할 수 있는 전령의 역할도 톡톡히 하고 있다.

금방이라도 잊어버릴 듯한 일상의 연속이지만 아이들이 써놓은 파릇 파릇한 생각과 이야기들은 늘 칠판에서 조잘거려 나를 항상 깨어 있게 한다.

가끔 우리 내외가 시골을 다녀온다든가 다른 외출에서 늦게 돌아올 경우에도 녀석들은 꿈나라로 들어간 지 이미 오래건만 이 한 밤중에도 칠판은 현관에서 우리 가정의 수호신인양 시원한 모습으로 "잘 다녀 오셨습니까?" 하며 큰 소리로 아주 정다운 인사를 한다.

딸 아이가 적어놓은 이 한 마디가 마치 칠판에게 시켜놓은 것처럼 환청으로 들려올때 우리는 고마움의 표시로 마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게 한다.

그리하여 사랑과 관심이라는 밑거름으로 비옥한 가정의 텃밭을 일구는 촉매 역할도 맡고 있는 것이다.

저 지난 가을과 지난 봄에도 쉴새없이 분주했던 칠판도 축제 분위기가 벌어져 연일 즐거운 비명을 질러 나도 덩달아 신이 났다.

키가 크고 믿음직한 제 오빠와는 달리 딸 아이는 키가 작아 늘 마음을 저리고 있었는데 1번을 벗어나 3번이 되었다는 희소식과 아빠의 승진 소식, 학교 예술제 행사 때 딸의 활약, 칠판도 우리 가족에 대한 축하 메시지를 보내느라 연일 환호성이었다.

하루에도 수없이 현관을 출입하는 식구들도 자연히 칠판에 눈이 가는 것은 당연지사이고 보면 가족으로서의 자격도 모자람이 없다.

그래서인지 자꾸 치워야 하는 배설물 처리의 번거러움도 거리낌 없이 자발적으로 깨끗이 치워둔다.

그러나 올 3월부터는 아이들과 칠판은 사춘기에 접어 들었는지 꼭 필요한 말 외에는 일절 대화가 없다.

무심한 표정으로 내일 00책값 학급비등 돈을 달라는 표현뿐이다.

너무나 바빠서 표정도 없이 그저 피곤해 보이는 모습만이 안타까울 뿐이다.

학교에서 선생님과 학생들을 만나 늘 일만 해야 했던 칠판이 아니라, 자유롭고 대할때 마다 편안하면서 친근감이 묻어나는 그런 생명체 같은 관계로 우리는 유지해 왔었다.

그런데 늘 자리 매김을 하던 칠판에게 안타까운 일이 생겼다.
가끔 벽에서 떨어지는 수난을 겪게 되 방법을 모색해 봐도 잘 떠오르지를 않는다.

벽 속이 비어 두들기면 "통통" 소리가 나는걸 보면 석고판인지 뭔지 박힌 못이 튼튼하지를 못하다.

조금만 부딪혀도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하니 시한부 자리가 얼마나 부담스러울까.

편리한 위치를 생각한다면 현재의 위치가 가장 적절한데 아무튼 칠판에게 유익한 자리를 만들어 영원한 식솔로 함께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