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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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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혼식날.


BY 雪里 2002-11-12

언제쯤되면 내남편이,
이불속에서 상쾌하게 일어나
훨훨 씻고 식탁에 앉으며,
얼른 밥달라고 하는 소릴 들어 보려나.

다른 사람들은 늙으면 잠이 없어져서
새벽에 일어나 자는 마누라 깨우며 빨리 밥하라
귀찮게도 한다더니만.

늘상 마음속에서 부글 거리는 푸념들이
오늘은 유달리도 농도 짙게 멱까지 차오르는데도
한숨 몇번 크게 들이키면서 우물거리고는 삼켜 버린다.

오늘은 특별한날,
참자!
참자!

여태껏 이십 오년도 잘 참았었는데,
앞으로도 그만큼쯤만 참다보면 다 살아 지겠지.

나는 이 늘보 남편이랑 살면서
혼자 화내다 참고, 같이 다투고 화내다가도 참았으며,
대가족의 구성원들로 인해 화가 많이 났다가도
나 하나 참으면 가정이 조용하다는
나만의 진리 같은걸 터득하여
그저, 그저, 참다보니
어느새 이만큼의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는걸
새삼스레 오늘 아침에 되짚으며
늘상처럼 찬손과 찬몸을 준비(?) 해 가지고
단잠에 빠진 남편 품으로 기어 든다.

"으~~~ 알았어, 일어날께."
"여행 가자며? 하루해가 많이 짧아 졌는데 ...."

둘만의 오붓한 시간이라는데 촛점을 맞췄을뿐
어느곳으로 어떻게 가야겠다는 계획도 없이
우리는 차를 몰고 무턱대고 달렸다.

결혼 이십오주년,
흔히들 말하는 은혼식날,
봄쯤부터 남편은 둘만을 위해 쓸거라며
얼마 되지 않는 돈이지만 준비 해놓고
절대 우리 둘만을 위해 쓸테니 만지지 말라 했었는데,
사람 사는게 그리 계획대로 살아 진다면
누군들 못 살까!
반쯤으로 잘라진 액수의 통장을 건네며
옷이라도 사입던지 맘대로 쓰라 한다.

"내 맘대로 나를 위해 돈을 쓴다. "
운전하는 내내 묘한 기분이다.

길가에 위치한 슈퍼에서 마실거리라도 살까하고
차를 세웠는데 애인인듯한 젊은 커플이
진열대에서 물건을 고르고 있다.

웃는 모습들,
움직임 하나하나,
둘이 마주보는 눈빛,
주고 받는 대화 내용들도,
우리와는 다른 세계에서 온 듯이 싱그럽다.
아니, 지금의 내가 보이는대로 말하면 귀엽다.

계산대앞에 서서 그들이 계산하는 물건들을 보니
우리가 계산할 꽈배기, 버섯 모양의 생과자, 포도봉봉,
갯지렁이 한갑과는 다르게
2%라는 캔음료 두개, 곽에든 애플파이, 또 몇가지...

내가 저만했을때,
지금의 나만큼 나이 든 사람들을 보면
원래 그만큼의 나이로 시작한 사람들로 보였는데,
저 젊은이들도 지금의 우리를 그렇게 볼까?

엉뚱한 생각들로 멈칫거리는 새,
운전대에 오른 그이가 얼른 타라고 독촉을 한다.

몇년만에 다시 와보는 서해는,
바닷가를 따라 시멘트 도로가 뚫려서 많이 편리해져 있다.
긴 방파제위에서 릴대를 들고 사람들이 즐비하다.
망둥이가 대부분이고 가끔 숭어가 올라오는걸 보고
릴대 하나를 펴서 지렁이를 매달아 던졌다.

망둥이 몇마리를 잡아서 옆에서 소주파티를 벌인 사람들에게 주고
바다가 내다보이는 횟집에서 점심을 먹고보니
어느새 해가 얕은 산꼭대기위에서 내려가 쉴 준비를 한다.

'우리 하루 더 쉬고 땅끝마을 다녀오자."
"안돼, 어른들이랑 애들은 어쩌고."
"전화해, 자고 간다고. 송호리 가서 자고 오자, 응?"
"뭐하러, 우리 시골가서 자, 숙박비 아끼고."

실랑이 하면서 올라탄 서해 고속도로에서 더듬거리며
내린곳은 신태인(?).
다시 호남고속도로로 올라타고 깜깜한 밤을 달려
올라 오니 열시가 넘었다.

괜한 시간을 도로에서 보낸게 속상해 죽겠는데,
주변머리 없는 마누라땜에 이틀도 못 쉰다고
남편은 투털거린다.

"송충인 솔잎을 먹는거야.
우린 아직 그렇게 남들처럼 쉴때가 안 됐어요.남은 식군 어쩌구."
"그래도 이렇게 오붓하게 쉴 수 있는 곳이 있잖아요."

봄부터 벼르고 벼른 은혼식날,
겨우 바다 구경만 하고 길에서 시간 보내다 돌아온 우리 부부의 말씨름을, 유난스레 까만 하늘속에 있어서 더 반짝이는 시골 별들이,
창틈새로 훔쳐보며 키득대고 있었다.

2002. 11. 10.
결혼 25주년 되는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