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부터 뭘 끄적이거나, 메모하기를 좋아하는
성격이기도 했지만, 나는 한번도 가계부를 쓰지 않고
산 시절이 없다.
잠시 혼자 살 때에도 (그땐 경황이 없어 제대로 된
가계부를 살 수도 없었는데...) 자그마한 금전출납부를
사서 썼었다.
내가 처음 결혼을 하던 88년....
난 결혼하기 1년전인 87년 12월에 이미 결혼을 준비
하는 마음으로 처음 가계부를 샀다.
외국대사관에 GSP건 때문에 외출했다가,
동방플라자쪽 서점에 들러 샀던 그 가계부.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각종 여성월간지에서
배부하는 가계부가 그중 나았었다.
사내연애를 했던 터라 결혼 소문을 내지 않기 위해,
그걸 사들고 사무실에 들어가기가 쑥스러워,
탈의실에 먼저 가서 쇼핑백에 넣어두었던 기억.
그렇게 나와 가계부의 인연은 시작되었다.
88년부터 2000년인 지금까지,
몸 담고 사는 곳이 바뀌고,
내 마음 속 주인이 바뀌는 상황에서도
나는 줄곧 가계부쓰기를 계속하고 있다.
나는 가계부를 왜 쓰는가.
다른 주부들도 마찬가지겠지만, 나 역시도
집안의 소소한 기록과 가정경제의 입출금등
가계부 본연의 목적을 위해 쓴다.
다만 한가지 더 유난스러운 것이 있다면,
나는 철저하게 금액을 정산하고 기록해둔다.
항상 영수증에 근거하여 정확하게 기록하고,
또 주계, 월계, 연간누계를 빠짐없이 해두기때문에
가계부 한권을 보면 우리집 1년 경제가 훤할 정도.
그런 나를 보고 남편은 가계부인데 그냥 대충쓰면
어떠냐고 하지만.....
내 입장은 또 그게 아니다.
그렇게 대충 쓸 요량이면 차라리 쓰지 않는 것이
더 속편할 것이라는 게 바로 나의 생각.
우리집은 철저하게 역할분담을 하는 편이다.
남편은 수입의 전부를 다 나에게 준다.
(아예 통장과 도장을 넘겨놓은 상태기 때문에,
남편은 통장과 도장에 대해 아예 관심도 없다.)
그리고 그외 기타 수입(나의 주식 재테크..등등)과
전체적인 지출은 모두 나의 소관이다.
그러므로 내가 가계부를 쓰지 않으면, 그야말로
우리집은 주먹구구식 살림을 하게 되는 셈이다.
하지만..... 내 성격이 그렇게 느긋하고 편안한 쪽이
못 되어서 주부로서의 의무라 생각하고 꼼꼼하게
가계부를 쓰고 있는 것이다.
많은 수의 아줌마들이 나에게 이런 말을 한다.
나도 처음에는 가계부를 꼬박꼬박 썼는데,
그걸 쓴다고 나갈 돈이 굳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써야 할 곳에 쓰는데 더 이상 귀찮아서 이젠 안쓴다고.
그렇지만 십년이 넘게 가계부를 써오는 내 입장에선,
또 다른 말을 하게 된다.
그때 그때 써야할 곳에 지출하는 것이야말로,
그것이 바로 가계부를 써야할 진짜 이유인 거라고.
영수증도 5년 이상, 더러는 그 이상 보관해두고,
가계부도 꼬박꼬박 써두면 이미 낸 것에 대한
이중고지서를 받았을 때 당황할 이유가 없다.
나도 몇 번 그런 일을 겪었는데, 그때마다 정확하게
납부한 날짜와 장소, 영수증을 제시하여 다시 한번
돈을 내야하는 일은 한번도 없었다.
그렇지만 의외로 그런 황당한 경우가 더러 있었고,
심지어는 아이의 영어학원비(액수도 적지 않은데..)
도 그런 경우가 몇번 있었다.
분명히 냈는데, 장부에 안 낸거로 되어있다면서 연락이
왔는데 아이편에 영수증과 그때 받은 봉투까지 같이해서
가져다드리니, 착오가 있어 죄송했다는 전화까지 해주었다.
그러니..... 가계부는 살림을 하는 여자에게는 반드시
라고 해도 좋을 만큼 필수가 아닐까 싶다.
어쩌면 가계부를 쓴다는 그 자체가 주부로서 안살림을
제대로 꾸려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인지도 모르겠다.
남편들은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대부분 묵묵히 밖에
나가 돈 버는 일을 "내가 왜 이걸 해야하냐!"라며
아내에게 따지지 않고 천직인양 하며 산다.
그런데 그렇게 남편이 벌어준 돈을 쓰는 아내들이,
살림을 좀 더 살뜰하게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도리가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물론 요즘 맞벌이를 하는 주부들도 상당수있지만,
그래도 아직까지는 남편의 수입이 전부인 가정도
아직은 꽤 있다고 생각한다.
주부가 가계부를 쓰면, 남편은 더욱 아내에게 신뢰감을
갖게되지 않을까 싶다.
물론 가계부를 쓰지 않는 주부라할지라도, 남편의 수입을
헛되이 쓰는 주부들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하지만...... 세월이 가면 모든 것이 희미해진다.
정작 남는 것은 그 시절을 남겨준 기록과 사진....
메모..등등 이런 것들이 오롯이 남는다.
부부가 일생을 함께 하면서, 지난 일을 조용히 회고해
볼때 가계부도 충실히 그 역할을 해주리라 믿는다.
그것이 내가 가계부를 꼭 쓰게 되는 이유이다.
우리 가족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남편에 대한
고맙고 감사한 마음으로.....
칵테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