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산한 가을 바람이 열려진 창틈을 통해 시리게 볼에 닿는다.
한동안 친구와 주고 받았던 편지들을 다시 읽어보며 먼 생각에 잠겨본다. 이제 힘겨운 삶에 숨조차 내쉬기 힘들다던 그녀는 얼마전부터 이상한 꿈에 시달린다며 전화를 했었다.
내 아이들과 똑같은 또래의 아이들을 가진 결혼경력도, 나이도, 그리고 아이들까지 첫애는 큰딸에 초등학교 5년, 작은애는 아들이고 초등학교 3년이라는 것까지 똑같은 쌍둥이 자매같은 그녀와 나.
그뿐이던가 성도 같고 이름도 중간글자만 다를뿐 똑같은 모습을 지닌 나 아닌 또 다른 나를 보는 듯한 느낌의 그녀. 그녀는 내가 어린나이에 겪은 아픔을 딱 10년이 지난 어느날 겪었다. 그래서 일까 누구보다 그녀의 아픔을, 그리고 나의 아픔을 잘 알기에 목소리만 들어도, 숨소리만 들어도 그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한번 보낸 편지는 그녀가 동호수를 쓰지 않아서 다시 반송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두번째 편지는 며칠째 시작만 해놓고 마무리를 하지 못한다는 말을 들었다. 분명 그녀는 지금 자신이 감당하기 버거운 일에 사로 잡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녀는 말하지 않는다.
남들이 들으면 웃을것이다. 간단하게 자판을 치면 보낼 수 있는 편리한 E-mail을 놔두고 무슨 생고생일까. 하지만 매일 우체통앞을 서성이며 기다려 본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자필 편지의 그 순수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그녀와 내가 처음 만난것은 사이버 공간에서였다. 하지만 약속처럼 둘은 이메일 보다는 자필편지를 더 좋아했고, 매일 그녀에게 편지를 쓰는 것으로 하루가 마무리 되곤 했었다. 그때 그 설레임... 하루종일 현관문을 열어보지도 않았던 내가 편지지를 사기 위해 문방구를 갔었고, 그녀에게 편지를 보내기 위해 우표를 사고, 그리고 빨간 우체통에 우정을 함께 보내었던 그 떨림.
이틀이 지나도 답장이 안오면 전화로 물어볼 수도 있지만, 무언의 약속처럼 편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은 이상한 비밀 같은 것이 있었다. 그렇게 주고 받던 편지는 그녀의 신상에 커다란 변화로 끊어졌지만 서로에 대한 믿음이 그녀가 언제나 내곁에 머물러 있게 해 주었다.
그리고 다시
그녀가 제자리로 돌아가 더 버거운 삶을 살면서, 편지를 주고 받으려 한다. 하지만 마음처럼 되지 않는 것이 또 사람의 일 아닌가. 그녀는 편지를 보내지 못한다. 그렇다고 내가 먼저 보내자니 그녀의 주소를 알지 못한다. 그녀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며 이사를 했고, 새로 바뀐 그녀의 주소는 물어보지도 않았고, 그녀도 알려주지 않았다.
첫문장....
친구에게 라는 단어만을 써놓은 저 편지지는 언제나 빼곡히 글자가 채워질지 난 알지 못한다. 다만 첫눈이 내리기전 그녀가 보낸 편지는 우리집 우체통에 꽂혀 있으리라는 것만 믿을 뿐...
시리다 못해 추운 바람이 매서워 열려진 창문을 슬쩍 닫는다. 그리고 그녀가 잠시 우리집에 머물러서 함께 지냈던 1년을 생각하며 슬픔과절망으로 얼룩졌던 그녀의 얼굴을 떠올려본다. 그녀에게서 진정 밝고 선명한 밝은 웃음을 찾을 수 있는 날을 기다리며...
2002.10.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