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해엔 겨울이 유난히 빨리 온다고 했다.
일찍부터 처마 끝이 얼어붙는데 차가운 구들장이,
일찍 진 꽃들이 사뭇 원망스러웠다.
해를 잡고 늘어지고 싶은 마음 위로 두런거리는 아이들의 속삭임이 낙엽처럼 쌓이고 있었다.
추위도 가난만큼 고독하다는 것을 그해 겨울 알았다.
* *
삼 년 전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눈이 많이 와서 읍내서 동네 들어오는 시내버스가 이틀 동안 재를 넘지 못해 끊겼고 아이들은 시냇가에 아기노루가 내려왔었다고 소리 높여 떠들고 다녔다.
대문 없는 마당에 아이들이 눈사람을 두개나 만들어놓고 미끄럼을 탄다며 비료 푸대를 하나씩 들고 언덕 위로 올라갔다.
누렁이가 신나게 꼬리를 흔들며 아이들을 뒤따르는 것을 본체만체 나는 보일러실을 불안하게 들락거렸다.
일찌감치 저녁밥을 해먹고 방에 들어앉았는데 옛집이라 등은 따뜻한데 웃풍이 세서 누워 있으면 코가 시렸다.
세상이 온통 흰눈으로 덮여 그 새하얀 빛이 달빛마저 하얗게 흡수해버린 밤.
보일러 스위치에서 띠띠 하는 소리가 나더니 비상깜박이가 들어왔다.
기름이 떨어졌다는 신호였다.
하필 이 추운 날... 무엇보다 나는 아이들에게 미안했다.
그때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너희들 김밥놀이 하고 싶다고 했지? 일어나 김밥놀이 하자. 엄마가 김밥말이 해 줄게. 자, 일어나, 어서.”
엎드려서 만화책을 보며 낄낄거리던 두 녀석은 내 말에 뛸 듯이 좋아한다. “정말? 야, 신난다. 정말이지, 엄마?”
나는 그럼, 그럼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장롱 속에 있는 이불을 모두 내려놓았다.
“지금부터 김밥 만다아~~”
먼저 큰 녀석을 이불 속에 넣고 돌돌 말았다.
그리고는 작은 녀석도 둘둘 말았다.
이불 틈새로 얼굴만 쏙 내민 두 녀석이 서로를 보고는 재미있다고 까르륵댄다.
아이들이 밥이고 김은 이불이다.
이게 바로 짱구 만화에 나오는 김밥놀이다.
“움직이지마! 김밥 풀어진다. 가만있어, 마지막으로 계란 후라이 덮는다.”하고 담요를 덮어주었다.
“엄마, 더워. 숨막혀...”하는 아이들.
“이제 엄마가 책 읽어 줄께 가만히 들어봐.”
그날 밤 나는 아이들에게 유태인의 '탈무드'를 읽어주었다.
잠자코 듣고 있던 아이들이 어느새 고른 숨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아이들의 쌔근거리는 숨소리 사이로 밤은 깊어갔다.
점점이 온기가 걷혀 가며 추워지고 있었다.
아이들 옆자리에 비집고 누워있는데 코끝도 시리고 마음도 시렸다. 이럴 때 체온을 느끼게 해 줄 남편이라도 곁에 있어주었더라면.... 젠장... 누가 나도 김밥처럼 말아주었으면...
추위와 둘이 날이 새도록 누워있는데 뼈 속까지 시려왔다.
문 창호지에 비친 하얀 세상 때문에 시려운 게 아니었다.
여인의 옷 벗는 소리처럼 사그락거리던 눈 오는 소리 때문도 아니었다.
그날밤 잠이 오지 않은 것은 한 겨울 추위에 기름이 떨어져버린 서러움보다는 그 서러움을 함께 나눌 사람이 곁에 없다는 아픔 때문이었다.
그 아픔이 추운 마음을 매섭게 파고들었다.
그해가 지나고 오늘, 사 년만에 우리는 크리스마스 트리를 했다.
크리스마스 트리 장식을 마치자 작은 아이가 “엄마, 우리 김밥놀이 안 할래?” 한다.
(김밥놀이는 무슨... 더워 죽겠구먼. 그때는 임마, 너희들 안 춥게 하려고 엄마가 별의별 생각을 다 짜냈던 거야. 그 때 너희 두 놈 다 이불로 말아주고 엄마는 말아줄 사람이 없어서 얼마나 추웠는지 알아?)
생각은 그렇게 했지만 “알았어. 이십 분만 하고 제 위치로 들 돌아오는 거다”하자 아이들이 와, 하고 좋아한다.
그해엔 참 추웠는데... 얼마나 추웠는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한해를 마감하는 12월. 올해에도 많은 일을 겪으면서 이겨냈다.
열심히 살았다.
후회하지 않을 만큼 열심히.
남들이 보기엔 초라하고 미천해 보일지 몰라도 나는 내 삶의 순간순간에 최선을 다했다는 감격이 뿌듯이 차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