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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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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라도 반가운 얼굴들.


BY 雪里 2002-10-23

진동으로 해 놓은 손전화가
무심코 있던 나를 벌떡 일으켰다.

"금요일에 너네집에 가려구... 별일 없지?"

전화기를 귀에 대며 몸은 이미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와 친구에게 밝게 톤 높은 목소리를 보낸다.

"그럼! 별일이 있어도 미뤄야지. 늬들이 온다는데."

"고구마 캤니? 안캤음 캐줄께."

"아직...., 그거 늬들이 해줄거잖아!"

"여태 안캤어? 서리도 왔는데?"

"그니까 빨리 와서 캐줘야지...."

"금요일에 가서 캐줄께, 그때 보자."

"오우 케이~! 기다릴께."

아직 금요일이면 내일 모렌데 나는 당장이라도 친구들이
내려오고 있다는 전화를 받은 것처럼
아직은 남아 있는 벼루의 먹을 없애 버리려고
먹물을 잔뜩 묻힌 붓으로 커다란 대나무잎을 죽죽 그려댄다.

호가 긴 붓을 새로 장만하고 붓에 서툴러서,
며칠째 붓과 친해지는 연습을 하고 있는데,
지루하고 따분한 시간에 걸려와준 친구의 전화는
정신을 번쩍 나게 해주기엔 충분했다.

"친구들 온대요, 금요일에."
"그래? "

가게의 문을 여니 자욱한 연기속에
단골 손님들이 여럿 앉아 커피를 배달시켜 놓고,
뚱뚱한 아가씨와 말장난을 치고 있다.

내친구들이 온다면 덩달아 좋아 해주는 남편이
들어서자마자 전하는 내말을 듣고
모처럼 입가에 웃음을 잔뜩 담는다.

큰아들의 아픔때문에 마음 고생이 되어
별로 웃음을 보이지 않던 남편의 얼굴에서
한참만에 편하게 번지던 편안한 웃음은
잠깐 동안 미소되어 머물다 곧 지워져 버린다.

평생 벗어나지 못하는게 자식의 그늘이겠지.

어릴적 교통사고를 당해 수술을 받던날,
무사히 일어나 주기만하면
더이상은 그애에겐 바라지 않을거라며
병실문 밖에서 한번도 찾지 않던 신에게 기도 했었는데,

나는 요즘 그때와 같은 마음이되어
아들만 아프지 않으면 아래로만 쳐다보며 살것이라고
혼자 다짐하고 또, 기도한다.
남편 역시 말은 안하면서도, 늘 그림자 진 마음이다가
잠깐 반가움이 스쳤던거다.

막상 친구들 앞에선,
말한마디도 즐겁게 못 건네는 사람이
속으로는 이 멀리까지 찾아 와주는 마누라 친구들이
고맙기도 하고 반갑기도 한가보다.
처가집 소말뚝보고 절한다는 말을, 순간 실감한다.

얼굴도 보고 고구마도 캐준다며 다녀갔던
친구들의 모습이 엊그제 일처럼 기억에 선한데,
벌써 세번의 다른 계절을 보내고
또 그때의 그 계절인 가을안에 와 섰다.

언제나 오고, 또 바뀌는 계절.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한 하루속에서
이루어 놓은것 없이 또 한해를 보내고 있는게
나만 인것 같아서
붙잡혀 있어주지 않는 시간만 아쉬워하며
또 하루를 보내고 있다.

친구들의 얼굴이 슬라이드필름 되어
눈앞을 스쳐지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