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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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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라는 이름의 한계


BY 칵테일 2000-09-04

어제는 일요일인데도 남편이 출근을 했다.
오늘 새 시스템이 오픈하는 관계로, 토요일도 새벽 4시쯤에나 들어왔었다.
토요일. 그렇게 완전히 파김치가 되어 돌아온 그를, 제대로 반기지도 못한 채 잠들어 버린 나.

금요일에도 늦게 들어오기는 마찬가지.
토요일 아침에 남편이 식탁앞에서 이야기하는 기가막힌 사연.

금요일에 집에 도착해서 (문을 미리 열어두었다. 밤에 딩동대는 거 싫어해서 올 시간 쯤에 문을 열어둔 것)안방으로 들어왔었단다.
내가 잠든 듯 하여 '나 왔어!'하고 가만히 나를 흔들었다네.
그런데 내가 너무도 화들짝 놀라며 (겁에 질린 듯.. 마치 강도 습격당한 거 마냥)소리내 우는 바람에 남편이 더 놀랐다고 한다.
그러면서 하는 말,

남편 : 남들은 자는 아내 흔들면서, 나 왔어 그러면 잠결에도 응.. 자기야? 뭐 이런 다는데, 허...참... 기가 막혀서!! 내가 당신 남편인 거 맞아? 어떻게 날 보고 그렇게 기겁을 하고 놀랄 수가 있냐?

나 : (전혀 기억못하며) 내가 언제???

남편 : 정말 생각 안나? 시침떼는 거 아냐? 정말 기분 묘하더라. 어떻게 마누라가 날 보고 그렇게 놀랄수가 있냐?

나 : (쬐금 미안해하며) 글쎄..... 내가 어쨌다는 거지?


그리고 일요일.
요 며칠을 시스템 오픈에 매달린 그도 지쳤던가 보다.
일요일엔 아예 집에 못 올지도 모른다면서 양복차림으로 나섰었는데, 차안이라면서 11시쯤 집에 도착한다고 전화가 왔다.

그러면서 늦긴 했지만 밖에 나가 술한잔 하자고 했다.

남편이 도착할 시간쯤에 아파트 현관앞에서 기다려, 동네 가까운 술집으로 갔다.

말이 술한잔 같이 하자는 거지, 난 술 한모금 마실 줄 모르기 때문에 그 혼자만의 독주다.

사이다 한 병 다 비워내기도 서늘한 시간, 남편은 이런 저런 자기 힘든 고충을 내게 이야기한다.

그렇지만 머리속에서는 그의 이야기를 잘 들어줘야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난 쏟아지는 졸음을 참아내기 힘들었다.
의자에 두 발을 다 올리고 거의 쪼그리고 앉다시피 해서, 감겨지는 눈을 겨우 힘줘 참아내며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이번 일을 준비하면서 나름대로 겪은 고충과 불만, 많은 생각들을 내게 이야기하고 싶었던가 보다.

그는 나에게서 '그래 수고했어.... 다 잘 될거야!' 뭐, 이런 종류의 말을 기대했던 거 같다.
하지만 내 머리속 생각과는 달리 난 엉뚱한 소리만 해댔다.

당신은 너무 마음이 약해서 탈이야... 아닌 것 같으면 빨리 포기해야지 어쩌구 저쩌구.

갑자기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진 그.
졸음에 겨워 나도 모를 소릴 지껄이고 나니 더 허탈해진다.

위로를 원하는 그에게, 왜 난 마음에도 없는 쓸데없는 소리만 지껄였을까. 후회도 된다.

그러면서도 남편은 내게 말한다.
내가 잠이 오면 사람이 조금 맛이 간다나? 후후
아마도 속상한 맘을 감추고자 하는 말이리라.

오늘.
어쨋든 그 오픈 행사는 잘 끝났다고 전화가 왔다.
고사도 잘 지냈고, 고삿돈으로도 꽤 들어와서 오늘 저녁은 사람들과 그동안의 노고도 위로할 겸 술자리를 갖는다고 한다.

며칠동안 회사에서 살다시피 일을 한 남편,
오늘 그래도 무사히 끝났다고 하니, 제대로 마누라로서 위로도 못해준 나는 그저 다행이란 생각 뿐.

대화라는 것이 과연 모든 일의 해결책일까.
차라리 침묵함으로 더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있을 수 있겠다싶은 역설적인 생각까지 드는데......

남편이 낮에 그런 말을 했다면, 내가 제대로 그를 위로할 수 있었을까?
모를 일이다. 아마도 낮에 그랬으면 남편의 상처가 더 컸을 수도 있겠지.
차라리 밤잠많은 마누라라 그렇지하고 스스로 위안삼는 편이 그에게는 더 편했을 수도.

밤잠이 많은 나는 여러가지로 참 불편하다.
차라리 아침에 이야기하면 좀 좋아? 하긴 아침에 하긴 조금 그렇긴하다만은.



칵테일